[안혜리의 인생]'아파트 마약' 취한 한국 재개발…대장동을 버려야 산다
모리빌딩 출신 박희윤 HDC 본부장 인터뷰
롯폰기 힐스와 아자부다이힐스 등 도쿄를 매력적으로 바꾼 '힐스'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모리빌딩(디벨로퍼·부동산개발업) 한국 지사장을 지낸 박희윤(56) 현대산업개발(HDC) 개발본부장 얘기다.
한국에서 재개발이란 아파트든 오피스든 상업시설이든, 그저 신축 건물 빠르게 분양해서 수익을 극대화하는 모델이다. 인허가를 둘러싸고 업자와 정치인·관료가 이권과 특혜로 엮여, 돈 놓고 돈 먹기식 불공정 게임을 벌이는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지난달 28일 단 하루에만 ▶백현동 개발 특혜 의혹 로비스트로 개발업자에게 70억원 받은 김인섭씨(이재명 대표 성남시장 선거 때 선대위원장) 징역 5년 확정판결 ▶대장동 개발 사업 관련 '50억 클럽' 의혹 박영수 전 국정농단 특별검사 징역 12년 구형 등 '재개발=비리' 편견을 강화하는 뉴스가 쏟아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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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빨리'가 전부인 서울
35년간 수천 번 설득한 도쿄
부동산기업 철학이 도시 바꿔
비전의 차이가 미래를 좌우
」
도쿄는 다르다. 지난해 오픈한 아자부다이힐스 등 대규모 도심 개발이 이뤄질 때마다 도쿄 시민 삶의 질을 높여주는 동시에 도쿄를 더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어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도쿄는 뭐가 달랐을까.『도쿄를 바꾼 빌딩들』의 저자이자, 모리빌딩 노하우를 한국에 접목하고 있는 박 본부장을 지난달 15일 현대산업개발 본사가 있는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만났다. 경험을 통해 나온 인사이트뿐 아니라 한국인 첫 모리빌딩 직원이 된 사연 등 흥미로운 인생 이야기를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IMF 지옥, 기회로 만들다
경남 마산(현 창원시) 촌놈, 그것도 전자계산학과 출신이 어떻게 모리빌딩이라는 일본 유명 디벨로퍼 회사에서 경력을 쌓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출발은 국민학교 때 다섯 살 위 형이 가져온 '사회과 부도'였다. 세계 지도를 본 순간 사랑에 빠져 매일 도화지 펴놓고 지도 속 지형을 따 도시를 그렸다. 관련 전공을 했으면 좋았으련만 학력고사 망치고 간 집 근처 창원대엔 도시 관련 전공이 없었다. 일단 취직 잘 되는 과를 택했지만 늘 도시재생에 대한 갈증과 결핍이 있었다. 러시아·일본 조차지 시절 근대적 도시계획으로 만들어져 아주 예뻤던 마산 적산가옥에서 태어났는데, 좋았던 동네가 점점 망가지는 걸 보기 괴로웠다. '도시를 살린다'는 명제에 계속 관심이 간 데는 이런 배경도 작용했다. 특히 경남은행 입사 첫해인 1993년 휴가가 딱 3일이라 배 타고 2시 50분이면 닿는 규슈 지방을 여행한 영향이 컸다. 인구(50만)는 엇비슷한데 쇠락한 마산과 달리 인프라와 디자인 등 개발 수준 높은 구마모토·나가사키 등 일본 지방도시는 큰 충격이었다.
입사 5년 차 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구조조정 탓에 길바닥에 나앉은 은행원이 많았는데, 난 이걸 기회 삼았다. 5년 차까지 연봉 3년 치 주며 명퇴 신청을 받길래 오직 꿈만 좇아 사표를 던졌다. 돌이켜보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막무가내로 하버드에서 온 한국 최고의 도시설계 전문가 고(故) 최막중 당시 한양대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에게 먼저 제안해 최 교수 연구실에 들어갔다. IMF 한파로 다들 당장 먹고살 궁리하던 시기에 서른 넘어 뜬구름같은 도시계획 공부한다는 것도 남들 보기엔 뜨악했을 텐데 더 황당한 짓을 했다. 고향 마산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도시재생 전공을 하는데, 지명의 기원 등 정작 도시 스토리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도시역사 분야 최고의 대가인 최종현 교수에게도 받아달라고 했다. 늦깎이 대학원생이 터무니없이 '교수 양다리'를 한 거다. 다행히 두 분 모두 품이 넓었다.
규슈의 기억이 강렬했기에 석사 후 일본에서 공부하기로 하고, 도시역사·도시재생·도시개발 셋 다 아우른 사토 시게루(75) 와세다대 교수(도시지역연구소장)에게 받아달라고 했다. 일본어 한마디 못 했는데, 어학원 기초반부터 고급반까지 동시에 수강 신청해 6개월 만에 확 는 일본어를 장착해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모리 회장과의 운명적 만남
모리빌딩과의 인연은 우연히 왔다. 와세다 도시지역연구소(박사 과정) 시절 최막중 교수에게 연락이 왔다. 신도림 개발을 청하려는 대성산업 김영대 회장이 두 번 거절당한 끝에 모리 미노루(2014년 작고) 모리빌딩 회장과 만나는 자리에 통역 겸 조언해줄 전문가로 동석해달라는 제안이었다. 배석 자리에서 '와세다 연구원' 찍힌 명함을 주니 모리 회장이 "신도림이 어떤 땅이냐"고 물었다. 밥값은 해야겠다 싶어 "잠재력 높은데 낙후된 땅이다. 모리빌딩 DNA가 뭐냐. 잠재력 발현 안 된 동네를 제대로 개발하고 운영해 동네를 바꾸는 회사 아니냐"고 했다.
이날 내가 한 얘기는 모리회장 듣기 좋으라고 한 얘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모리빌딩은 잠재력 있지만 낙후된 지역의 주민과 정치인들에게 비전을 보여주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끈질기게 이들을 설득해서 결국 동네를 바꾼 도심 재개발사업으로 유명하다. '힐스' 시리즈가 잘 보여준다. 일본 최초의 민간 대규모 재개발 사업인 아크 힐스(1986)는 19년, 영국 천재 건축가 토머스 헤더윅 디자인으로 화제를 모은 아자부다이힐스(2023)는 무려 35년이 걸렸다.
난 도쿄 도심 재개발 사업의 변곡점을 만들어낸 롯폰기 힐스(2003) 완공 후인 2006년 입사해 2018년까지, 그것도 도라노몬 힐스(2014~20023)나 아자부다이힐스같은 도쿄 도심 사업이 아닌 한국 관련 컨설팅 업무를 했다. 하지만 모리빌딩이 일하는 방식을 보면서 재개발 사업이 어떻게 도쿄를 바꿀 수 있는지 비결을 알 수 있었다. 비결이라기보다 기업 철학을 배웠다. 재개발 사업을 위해 조합원을 수천 번 만나 설득하며 35년을 기다릴 수 있었던 건 눈앞의 돈을 좇지 않고 내가 사는 도시문제를 해결해 한층 더 살기 좋고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어 장기 수익을 올린다는 비전이 있기에 가능했다. 돈과 가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가령 '직장은 도심, 주거지는 외곽'이라는 고도성장기 오피스빌딩 모델이 지옥철 같은 사회문제를 만들었다는 반성이 먼저였다. 그래서 일본 최초 직(職)-주(住)-락(樂) 복합개발인 아크 힐스가 나올 수 있었다.
대장동식 '먹튀' 벗어나야
일본과 달리 한국 시행사(디벨로퍼)가 욕먹는 이유는 대장동 사례가 보여주듯 '먹튀'다. 공공에 가서 "땅 싸게 달라, 아파트 많이 지어줄게"라며 사업을 딴 후 남의 돈(대출) 뻥튀기해서 분양으로 큰돈 벌어 손 털고 나간다. 디벨로퍼 본연의 기획 능력 대신 인허가 잘 받고 돈 당겨오는 능력만 필요하다. 도시에 대한 비전은커녕 주민 삶의 질을 높이는 상품에 고민 없는 재개발, 그게 지금 우리 부동산 시장이다.
우리도 이젠 민간이 이런 성공을 보여줄 때가 됐다. 아니, 보여줘야 한다. 과거 하던 대로 하기엔 서울 동북, 서북 할 것 없이 아픈 곳이 너무 많다. 그러려면 아파트라는 '마약'부터 끊어야 한다. 짓기만 하면 분양되니 도쿄 모리빌딩의 복합개발 같은 도시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도시모델에 대한 고민 없이 너도나도 아파트만 짓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시장이 꺾이면 미분양 사태 같은 침체 사이클을 타는데도, 언제까지나 단기 분양 수익만 노려 아파트라는 마약에 취해 살 수는 없다. 더군다나 이제 우리 경제는 아파트·오피스 대충 지어도 팔리던 고도성장기가 아니다. 이미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고, 서람들 눈높이는 더 높아졌다. 디벨로퍼 본연의 역할인 내가 사는 동네를 더 좋게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모리빌딩에서 컨설팅 업무를 하다 정몽규 회장이 직접 스카우트해 HDC로 옮긴 것도 한국을 바꿔보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공공도 마찬가지다. 이미 20여년 전 공공 주도의 일본 지방도시 개발사업이 망한 걸 다 봤으면서도 우린 20년 지나 그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지난 6월 오세훈 서울시장과 도쿄에 동행해 모리빌딩 안내를 맡았을 때 아자부다이 힐스 인근 '어반 랩'에 가서 도쿄 1000대1 입체모형을 보여준 것도 이런 의도가 있었다. 일본에선 민간 기업도 도시와 동네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며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우린 과연 어떤 비전으로 재개발하고 있나. 이런 비전의 차이가 20년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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