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원의 시선] 토끼와 거북이의 전설

정제원 2024. 12. 4.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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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원 문화스포츠 디렉터

2009년 2월 15일 중앙SUNDAY의 골프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지금 상반된 인생 여로를 걸어온 두 선수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다. ‘1000만 달러의 소녀’ 미셸 위와 ‘골프 지존’ 신지애다.”

기자는 당시 스무 살 재미동포 골프 선수 미셸 위와 전남 영광 출신 21세 신지애의 활약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썼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2024년 12월. 골프 천채소녀로 불렸던 미셸 위는 필드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신지애는 여전히 어린 후배들과 샷대결을 펼치고 있다.

「 36세에 65번째 우승한 신지애
비결은 도전 정신과 변신
모진 시련이 성공의 밑거름

지난 1일 호주에서 들려온 신지애의 우승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1988년생이니 만 36세. 20대 초·중반의 골퍼들이 주름잡는 여자 프로골프 무대에서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베테랑이 우승했다니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2006년 프로 무대에 뛰어든 신지애의 65번째 우승이다.

잘 알려진 대로 신지애의 키는 1m56㎝다. 여자 프로골퍼치고는 작은 편이다. LPGA 투어는 물론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도 그보다 키가 작은 선수를 찾아보기 어렵다. 작은 키, 30대 중반이라는 핸디캡을 딛고도 그가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신지애는 골프 클럽에 인생을 걸었다. 2006년 데뷔 이후 3년 만에 국내 투어를 평정했다. 이제까지 한국과 미국·일본 투어를 돌며 상금으로만 통산 210억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그가 겪었던 모진 시련이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중학교 3학년이던 2003년 그는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 월세 15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웅크려 잔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받은 보험금이 그의 밑천이었다. 엄마의 목숨과 맞바꾼 돈으로 빚을 갚고, 나머지 돈으로는 훈련 비용을 댔다. 매일 아파트 20층 계단을 매일 오르내렸고, 이것만으로 모자라 운동장을 20바퀴씩 뛰었다.

미셸 위는 1989년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키는 1m83㎝다. 열여섯 살 때 이미 그는 압도적인 피지컬로 여자 골프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세계적인 스윙 코치인 데이비드 레드베터의 체계적인 지도를 받았다. 만 16세가 채 못 된 2005년 10월 그는 나이키·소니 등과 해마다 1000만 달러(약 140억원)를 받기로 하는 내용의 계약을 하면서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골프 천재소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미셸 위의 성적은 팬들의 기대에는 못 미쳤다. 10대 시절 남성 골퍼들과 샷대결을 펼치기도 했지만, 정작 LPGA투어에선 통산 5승을 거두는 데 그쳤다. LPGA 투어에서 활약하던 시기, 미국의 명문 스탠퍼드대에 진학해 골프와 학업을 병행했다. 그러다 2019년 미국 명문가의 자손과 결혼했다. 미셸 위는 2020년 첫 딸을 낳은 데 이어 지난 10월엔 아들을 출산하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대조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두 선수. 기나긴 인생 여로에서 누가 더 성공했는지, 어떤 인생이 더 행복한지 제3자가 단정할 순 없다. 그러나 적어도 프로골프 무대에서는 샷대결의 승자가 누군지 분명하다.

기자는 골프담당 초년병 시절 미셸 위와 신지애를 필드에서 만났다. 미셸 위는 10대 때부터 드라이브샷 거리가 300야드를 넘나들었다. 신지애는 220야드에 그쳤다. 나이는 비슷한데 여러모로 대조적인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먼 훗날 이 레이스의 승자는 누구일까 궁금해하곤 했다. 그리고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펜을 내려놓으며 긴 레이스의 승자를 가리게 됐다.

결론은 천재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레이스에 전념하지 않는 토끼는 꾸준한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운다.

신지애가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후배들과 샷대결을 펼칠 수 있는 비결은 끊임없는 ‘도전 정신’과 ‘변신’이다. 스스로 한계를 규정짓지 말고 끊임없이 밀어붙이라는 게 신지애의 조언이다. 현재에 만족하는 순간, 발전을 멈추게 된다고 신지애는 설파한다. 그래서 18년 차 프로 골퍼인 그는 아직도 퍼팅 스트로크를 고치고, 스윙을 가다듬는다.

신지애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는 그의 한결같은 태도다. 일직선으로 곧바로 나간다는 뜻에서 ‘초크 라인’으로 불리는 샷만큼이나 그의 태도도 변함이 없다. 더는 오를 곳이 없어 보이는데도 그는 필드에서 후배들과 샷대결을 펼친다. 일찌감치 은퇴한 동료들이 와인을 음미하고 있을 때 그는 여전히 비바람을 맞으며 클럽을 휘두른다. 모진 시련을 겪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진지한 태도다.

정제원 문화스포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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