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부유층 과세하려다 좌우 협공에 프랑스 내각 붕괴 위기
미셸 바르니에 프랑스 총리가 의회 표결을 건너뛰고 대기업·부유층에 대한 증세를 밀어붙이다가, 좌·우 야당의 협공을 받아 내각이 붕괴 될 위기에 처했다. 내년 예산안 편성이 불발되면서 최악의 경우 공무원 급여와 정부 결제가 중단되는 ‘셧다운’이 벌어질 수도 있다.
바르니에 총리는 지난 2일(현지시간) 프랑스 헌법 제49조3항을 발동해 직권으로 내년도 예산안과 관련한 핵심 법안인 사회보장 재정 법안을 통과시켰다. 프랑스 헌법 49조3항은 정부가 긴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때 국무회의의 승인을 받은 법안을 총리가 의회 투표을 거치지 않고 통과시킬 수 있다. 바르니에 총리는 “프랑스 국민은 국가의 미래보다 사익을 우선시하는 우리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제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책임을 직시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에 도달했다. 나도 내 책임을 직시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야당들은 총리를 불신임하겠다고 공언했다. 원내1당인 좌파연합을 이끄는 마틸드 파노 굴복하지않는프랑스 원내대표는 “바르니에는 역사상 최단 임기의 총리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워내 3당인 극우 성향의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원내 대표도 “불신임안에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회에서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내각은 붕괴되고 법안도 폐기된다.
발단은 프랑스의 만성적인 재정적자였다. 지난 9월 취임한 바르니에 총리는 한 달 뒤인 10월 과감한 증세와 긴축을 내용으로 하는 내년도 예산안을 내놨다. 재정적자가 지난해 GDP 대비 5.5%로 늘어난 데 이어 올해 6.1%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자, 바르니에는 법인세를 올리고 상위 0.3%의 초고소득자에 한시적으로 추가 과세하는 예산안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193억 유로(28조4000억원)의 세수를 더 확보하고, 413억 유로(60조8000억원)의 공공지출을 삭감해 재정적자를 유럽연합(EU)의 기준치인 GDP 대비 3% 이하로 낮추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좌파연합인 신민중전선(NFP)과 극우 성향 국민연합(RN) 양쪽으로부터 불평등을 심화하고 기업 부담을 늘린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 7월 총선 결과 2당으로 주저않은 중도연합의 에마뉘엘 마크롱이 지난 9월 우파 공화당 출신인 바르니에를 총리로 낙점한 데 대한 좌파의 불만, 이 기회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RN의 의도가 결합했다.
내각 붕괴는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프랑스 하원 의원 전체 재적 의원 577명 가운데 공석 2자리를 제외한 가결 정족수는 288명이다. LFI와 RN과 그 연대 세력을 합하면 300석을 가볍게 넘는다.
하원 표결에 따른 내각 해산은 1962년 10월 샤를 드골 대통령 당시 조르주 퐁피두 정부가 유일무이하다. 바르니에 총리의 불신임이 가결되면 62년만의 내각붕괴이자,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최단기 총리라는 오명을 얻게된다. 총리의 불신임안은 4~5일 중 표결에 부쳐진다.
내각 붕괴시 바르니에 정부가 추진하던 모든 예산안이 폐기된다. 또 이달 31일까지 예산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공무원 급여지급과 정부 결제 등을 할 수 없게 된다. 정부 행정이 마비되는 ‘셧다운’이 발생하는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새 총리를 임명한 후 새 내각이 예산안을 제출할 수 있지만, 의회 구도상 총리 지명이 녹록치 않다. 올해 예산을 내년까지 연장하는 특별법안을 제출할 수 있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하고 특별법안 역시 부결 가능성이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헌법 16조에 규정된 대통령의 비상 권한을 발동할 수 있다. 프랑스는 공권력의 정상적인 기능이 정지된 경우 대통령이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다. 다만 정치적 후폭풍이 거셀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 역시도 어려운 선택지다.
이같은 프랑스의 정치위기로 유로화 가치가 폭락하고, 프랑스의 국채금리 역시 치솟았다. 유럽 경제의 안정성과 통합을 보여주는 프랑스와 독일 10년물 국채금리의 차이는 약 88bp로 201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박현준 기자 park.hyeon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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