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친일외교관 스티븐스 처단한 장인환

김삼웅 2024. 12. 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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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 17] 고문의 후유증으로 입원 중 1930년 5월 22일 병원에서 투신 절명하였다.

[김삼웅 기자]

 장인환 의사
ⓒ 자료사진
장인환(張仁煥, 1876~1930)은 평안도 평양부 대동강면 선교리에서 아버지 장영구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잡화점에서 고용살이를 하다가 자립하게 되었으나 동업자의 배신으로 폐업하고 말았다.

18세에 평양부 중앙감리교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학으로 숭실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1904년 11월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1년 여 일하며 돈을 모아 미국본토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철도공사가 한창이어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후 식당에서도 일하였다.

아시아인들의 급격한 이주로 일자리를 잃게 된 주민들의 반감이 심해지면서 알래스카로 이주했다가 1년여 후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1907년 교포들의 모임인 대동보국회에 참여하면서 국내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되고 고국이 위기로 빠져들었다. 그 무렵(1908년 3월 20일) 미국인으로 대한제국의 외무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알았다.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는 워싱턴 DC 컬럼비안대학교와 하워드대학에서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졸업 후 미국 국무부의 외교관이 되고 1873년 일본으로 건너가 주일 미국공사관 서기로 근무하면서 일본과 인연을 맺었다. 한 때 주일 대리공사를 지내기도 하다가 미국 워싱턴 소재 일본 외무성의 촉탁, 일본 외무성에 근무하면서 1885년 조선에 파견되어 한성조약을 지원했다. 일본 황실로부터 훈고등서보장을 받은 골수 친일파다.

고종은 일본이 추천한 그를 외무고문으로 위촉했다. 외교에 관한 업무 일체를 그의 의견을 들어 실시한다는 제1차 한일협약에 따른 조처였다. 월급을 조선에서 받은 스티븐스는 을사늑약 후 이토 히로부미의 청에 따라 미국 언론을 상대로 극도의 친일과 반한 발언을 쏟아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살아가기 어려운 나라다. 그러므로 조선과 일본 간의 조약체결은 정당한 것이며 이를 통해서 조선은 일본의 도움을 받는 혜택을 얻었다."

<샌프란시스코 콜>지와 인터뷰에서 "미국이 필리핀을 위해서 하는 것과 같은 일을 대한제국에서 한 일을 위해서 하고 있는 중이다.", "관료들은 그렇지 않은 반면에 농민들은 일본을 환영하였으며 그런 관료들 조차도 자기 나라의 유일한 희망을 옛 제도의 개혁에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의 각 매체를 통해 조선을 무지한 민족이라 매도하고 일본을 찬양했다. 현지의 교민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미주 한인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1908년 3월 22일 회합을 갖고 최정익·정재관 등 4인 대표를 스티븐스에게 보내 신문보도의 정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오만방자하게 모독적 언사를 계속했다. 정재관이 스티븐스를 거꾸러뜨리고 일행은 의자를 들어 내리쳤다.
 대구 조양회관에 전시되어 있는 장인환, 전명운 지사의 사진이다. 두 지사는 1908년 3월 22일 대한제국 외교 고문인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하여 처단했다.
ⓒ 조양회관
한인의 두 단체는 대책회의를 열어 방법을 논의했다. 다음날인 3월 23일 오전 9시경 스티븐스가 대륙횡단 철도를 타기 위해 오클랜드 폐리부두 선창으로 갈 것이라는 정보였다. 정보는 정확했다. 이 시각 그는 일본총영사 고이케의 안내를 받으며 현장에 나타났다. 자동차에서 내릴 때 전명운이 뛰어나가 총을 쏘았으나 격발되지 않았다. 전명운은 당황하지 않고 달려들어 그의 얼굴을 구타했다.

체구가 큰 스티븐스가 전명운을 가격하려 드는 순간, 장인환의 권총이 불을 토하였다. 첫 발은 전명운의 가슴에, 두 번째, 세 번째는 스티븐스의 어깨와 하복부에 적중했다. 총을 맞은 전명운은 쓰러지고 스티븐스는 절룩거리며 자신의 차량 쪽으로 걸어 나갔다. 경찰이 달려와 장인환과 전명운을 체포하고 스티븐스는 이틀 후 절명하였다.

장인환은 유치장에서 간수가 "총을 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느냐." 묻자 "스티븐스는 우리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겼으며 한국인의 원수다. 마땅히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답변했다. 재판에 넘겨졌다.

두 의사의 의거는 한국사회는 물론 미국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오클랜드 의거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시작된 이래 최초의 의열투쟁으로 이듬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으로 이어졌다. 두 의사의 재판을 위한 의연금이 미주 본토, 하와이, 멕시코, 국내, 연해주, 만주, 중국 등지를 포함한 한국인이 거주하는 세계 각지에서 답지하여 7,390 달러가 모아졌다.

법정의 통역으로 경찰서 심문 때부터 수고한 양주삼 전도사 대신 하버드대학에서 유학중인 이승만을 초청했다. 하지만 "1908년 7월 16일에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형편을 살피고 통역하기를 거절하였는데, 그 이유는 시간 관계로 오래 있을 수 없으며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 하고 동 8월 25일 동방으로 갔다." (주석 1)

이승만이 내세운 이유 중 학생신분으로 '시간 관계'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고 치더라도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는 대목은, 그의 역사인식과 애국심에 적지 않게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어려운 살림의 교포들이 푼푼이 모아 보낸 비용으로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 버린 것이다.

재판은 계속되어 1909년 1월 2일 장인환에게 25년 금고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샌쿠에틴 주립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였다. 변호인단이 세 차례 가석방 청원서를 내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등의 보석 요청이 있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1919년 1월 1일 교도소 측의 가석방으로 10년 8개월 만에 풀려났다.

장인환 의사는 석방되어 감옥에서 배운 세탁업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 23년 만에 귀국했으나 요시찰 인물로 일제의 감시를 받다가 그해 10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막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입원 중 1930년 5월 22일 병원에서 투신 절명하였다.

미주 한인사회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유해는 사이프러스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75년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상을 추서했다.

주석
1> 김원용, <재미한인 50년사>, 326쪽, Calif. U. S. A, 1959.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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