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건강] 뇌전증 30%, 약 안듣는 난치성… 로봇수술로 생명 지킨다
이대목동병원 ‘뇌전증 정밀치료팀’
과거 ‘간질’로 불렸던 뇌전증은 2011년 병명 전환 이후 ‘뇌의 질환으로 정신병이 아니다’는 인식이 많이 확산됐으나 사회적 낙인과 차별적 관행이 곳곳에 존재한다. 이로 인해 환자와 가족들이 병명과 증상을 숨기거나 치료를 주저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보다 적극적인 인식 개선 노력과 법·정책적 보호장치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치료 효과가 높은 뇌전증 신약이 근래 많이 개발됐지만 약가 문제로 국내 환자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치료 접근성 향상 방안이 서둘러 강구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뇌전증 환자의 70% 정도는 약물 복용으로 정상인과 다름없이 생활할 수 있다. 약물이 듣지 않는 30%의 난치성 뇌전증은 수술로 치료 가능한데, 최근 ‘수술 도우미 로봇’이 도입돼 정확성과 안전성을 높이는 추세다. 이화여대목동병원 뇌전증 정밀치료팀은 난치성 뇌전증 환자에 특화된 다학제 진료와 수술 로봇을 활용한 신속한 치료로 주목받고 있다.
뇌전증은 뇌신경세포가 일시적 이상을 일으켜 과도한 흥분 상태를 보이는 질환이다. 의식 소실이나 발작(경련), 행동 변화 등 뇌기능의 일시적 마비를 초래한다. 신생아는 출산 전후 요인, 학령기에는 머리부상 등 외상, 발달이상, 뇌수막염 같은 감염성 원인이 많다. 청장년기에는 외상·뇌종양·혈관성 질환, 노년기에는 치매와 뇌졸중 등 퇴행성·혈관질환과 관련성이 높다.
대한뇌전증학회 연구에 따르면 국내 뇌전증 환자는 약 20만~50만명으로 추정된다. 매년 10만명당 약 20~70명의 환자가 새로 발생하고 있다. 이대목동병원 신경과 이향운 교수는 2일 “대략 연간 1만명 안팎의 신규 환자가 발생한다는 의미로, 전체 인구의 약 0.5~1% 수준이며 국제적으로 보고된 유병률과 비슷하다”면서도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년층의 뇌전증 발생률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최근 뇌전증 치료 신약에 대한 국내 환자들의 낮은 접근성 문제가 불거졌다. 국산 항뇌전증 약물인 ‘세노바메이트’가 전 세계 임상시험을 거쳐 2019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2021년 유럽 의약품청(EMA)의 승인을 받아 해외에서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낮은 약가 책정으로 수익성을 우려한 제약사가 허가 신청을 미루면서 환자들이 해당 약을 쓰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 교수는 “한국 환자들은 해외에서 약을 직접 구입하거나 다른 국가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환자에게 비현실적으로 높은 경제적 부담을 안겨 치료 접근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혁신 신약에 대해선 특별한 약가 정책을 마련하거나 초기 허가 후 일정 기간 약가를 조정하는 방식 등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뇌전증은 약물로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없거나 부작용이 심해서 원하는 만큼 증량이 힘든 경우 수술 치료를 고려한다. 통상 뇌전증 환자의 30%가 2가지 이상 항뇌전증 약물을 투여해도 증상 조절이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환자들은 일반인에 비해 돌연사율이 15배 높다. 3가지 이상 약물에 반응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 이상 경련을 하는 중증 환자는 돌연사율이 일반인의 30배나 높다. 이대목동병원 신경외과 김영구 교수는 “이런 환자들은 10년 이상 장기 생존율이 50%가 채 안 된다. 약물이 안 듣는 난치성 뇌전증 환자의 수술 치료는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수술은 뇌전증 발생 부위를 제거하거나 발생 강도 및 횟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복잡한 뇌의 기능을 정확히 파악해 뇌전증 발생 부위를 지도화하고 이를 제거할 수 있는지에 대한 평가가 매우 중요하다. 기존에는 머리뼈를 열어 전극을 뇌표면에 깔고 뇌의 전기 신호를 포착하는 방식으로 수술이 이뤄졌다. 하지만 최근엔 머리를 열지 않고 뇌로 전극을 삽입, 전기 신호를 측정해 증상 발생 부위를 파악하는 ‘정위 뇌파(SEEG)’ 수술이 많이 시행된다. 김 교수는 “이런 수술법은 병소를 세밀하게 지도화한 뒤 제거할 부위와 손상되면 안되는 부위를 잘 구분해 정밀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정교한 미세 뇌수술을 가능하게 돕는 첨단 로봇기기가 개발돼 보급되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뇌 특정 부위를 X, Y, Z로 좌표화할 수 있는 고정장치가 이용됐다. 전극 하나를 뇌안에 넣기 위해 각각의 좌표를 의사가 직접 ㎜단위 눈금을 맞추고 수술을 집도했기 때문에 수술 시간이 길고 오차가 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신 수술 보조 로봇 ‘카이메로’를 이용하면 로봇이 소수점 이하 좌표까지 맞춰서 정확히 설정해 주고 의사는 정해진 표적에 수술 기구를 배치하면 돼 신속한 수술이 가능하다. 물론 실제 두개골에 구멍을 내고 전극 등을 삽입하는 것은 수술자가 직접 한다. 현재 세브란스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대어린이병원,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성빈센트병원, 인제대해운대백병원, 고려대구로병원, 이대목동병원 등에 해당 로봇이 도입돼 있다.
김 교수는 “두개강 내 병변 또는 구조물에 십여 개의 전극을 넣어 뇌경련 시작점을 찾는 입체 정위 뇌파 수술에 최적화된 장비”라고 평가했다. 이어 “난치성 뇌전증뿐 아니라 파킨슨병이나 뇌출혈 수술, 뇌종양 조직 검사 등 다양한 신경외과 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이대목동병원은 카이메로 도입과 함께 신경과 신경외과 소아청소년과 영상의학과 핵의학과 교수 등으로 다학제 통합치료팀을 꾸려 난치성 뇌전증 정밀치료에 도전하고 있다.
글·사진=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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