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문화] “치열한 통찰이 있고 남김없이 모든 걸 담은 것이 좋은 책”
매주 출판 담당 기자 책상에는 100권 이상의 책이 쌓인다. 그중 골라서 지면에 소개되는 책은 10권 남짓이다. 나름 ‘좋은 책’이라고 선택한 책들이다. 좋은 책이라고 꼭 많이 팔리지는 않는다. 나중에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찾기 힘든 책들도 많다. 누구나 좋은 책의 기준은 다르니까. 글항아리에서 나오는 책은 매번 ‘좋은 책’이었다. 대부분 두툼한 책들이다. 벼르다 인터뷰를 잡았다. 수능일이었던 지난달 14일 경기도 파주시 출판단지에 있는 글항아리 사무실을 찾았다. 강성민(51) 대표에게 책은 평생의 동반자였다. 책과 함께 자랐고 책과 관련된 직장생활을 거쳐 지금은 직접 책을 만들고 있다. 좋은 책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은 계몽사판 세계아동문학전집과 컬러학습대백과를 사주셨다. 닳도록 읽었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때 김용의 ‘영웅문’을 만났다. 그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빠져들었다”고 했다. ‘소오강호’ ‘녹정기’ ‘천룡팔부’ ‘북해의 별’ 등 번역돼 나온 김용의 모든 책들로 책꽂이는 가득찼다. 전부 10번 이상은 읽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가서야 본격적으로 소설의 세계에 빠졌다. 신경숙의 소설을 노트에 베껴 쓰기도 했다. 가장 영향을 준 것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이었다. 소설 속 대학 국문과에 다니는 주인공이 마음속에 들어왔다. 구도자이자 갈등하는 ‘문학청년’의 이미지는 강 대표에게 인생의 모델과 같았다. 헤르만 헤세도 열심히 읽었던 터라 독문과도 고민했지만 결국 대학은 국문과를 선택했다.
소설을 써보겠다고 대학에 들어갔지만 막상 시에 빠져들었다. 신입생 때 시 쓰는 동아리를 소개하던 선배는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3년 동안 공장을 다니다 뒤늦게 입학한 한 학년 선배는 낡은 코트를 입고 교단의 탁자를 손으로 치면서 “웬만한 각오로는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마라”고 했다. 강 대표는 “그 표정과 결기에 반해서 바로 가입했다”고 말했다.
대학 내내 시만 썼다. 점심을 거르고 아낀 돈으로 시집을 모았다. 당시 학교 식당에서 가장 비싼 게 곰탕이었는데 1500원이었다. 이성복 시인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1200원 할 때 샀다. 졸업 때까지 모아 읽은 시집은 500권이 넘었다. 신춘문예에 응모해서 최종심까지 갔다. 당시 심사 위원들은 “매혹적인 상상력을 보여주었지만 그걸 꿰어내는 맥락의 힘이 살펴지지 않았다”고 평했다. 강 대표는 “지금 보면 생각이 한참 모자란다는 얘기인데, 아전인수로 읽어서 마치 제가 시인이 된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그걸로 만족했다. 국문과 대학원에 진학한 상태였는데 시와는 점점 멀어지고 문학이론 쪽에 더 관심이 갔다.
대학 시절 가장 영향을 미친 책을 한 권만 꼽으라면 ‘김현 전집’을 택하겠다고 했다. 그는 “김현 선생님의 책들을 반복해서 읽으며 좋은 글에 대해서, 공부하는 인간의 자세 같은 것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석사 과정을 마칠 무렵이었다. ‘출판저널’에서 기자를 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인을 통해 인연이 닿아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출판 저널에서 2년, 교수 신문에서 5년, 그렇게 7년을 보냈다. 늘 책을 읽고 리뷰를 쓰거나 저자와 인터뷰를 하는 게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출판계 사람들하고 만날 기회가 많았다. 항상 드는 생각은 재미없는 사람들이라는 거였다. 당시에는 책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교수신문 편집국장 때 기획 연재된 콘텐츠를 책으로 만들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강 대표는 “출판사 편집자들과 책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면서 출판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교수신문을 그만두고 잠시 쉴 때 운명적으로 문학동네와 만난다. 자회사(임프린트)를 만들기로 하고 지원자들과 면접을 하던 때였다. 강 대표도 도전했다. 50가지가 넘는 기획안을 들고 갔다. 당시 문학동네 대표는 “현실화 가능성이 매우 낮은 기획들”이라며 “마치 링 위에 올라가 보지 못한 선수가 링 밖에서 떠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혹평했다. 그래도 문학동네는 강 대표를 선택했다. 강 대표는 “출판저널과 교수신문에서 만든 인적 네트워크가 확장성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강 대표의 글항아리는 문학동네의 1호 임프린트가 된다.
글항아리를 시작할 때부터 출판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비어 있는 곳을 채운다”였다. 그는 “남들이 놀지 않는 빈 공터 같은 데 가서 땅을 파고 노는 것처럼, 남들이 보면 무의미한 삽질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 그게 쌓여서 의미를 평가받는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첫 책은 중요했다. 우선 강 대표는 전국 투어에 나섰다. 필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당시 계명대의 강판권 교수 연구실을 방문했다. 강 교수가 썼던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 세기’를 교수신문에 소개했던 인연이 있었다. 연구실에는 두툼한 원고 뭉치가 있었다. ‘나무와 함께 떠나는 한자여행’이라는 가제가 붙어 있었다. 6개월 동안 공을 들여 ‘나무 열전’으로 제목을 바꿔 2007년 6월 책을 만들어 냈다. 글항아리의 첫 책이었다. 화제를 모았고 성공도 했다.
글항아리의 이름을 출판계와 독자들에게 각인시킨 것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었다. 강 대표는 얽힌 일화를 들려줬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책이었지만 판권은 고작 3500유로(약 500만원)였다. 보통 초대형 베스트셀러의 판권은 1억원 안팎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헐값이었다. ‘21세기 자본’을 글항아리가 차지한 건, ‘빈 곳을 채우자’는 강 대표의 원칙 덕분이었다. 당시 출판계에서는 프랑스 필자는 인기가 없었다. 더군다나 책 분량도 만만치 않아서 번역은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다른 출판사들은 눈여겨보지 않았다.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다. 강 대표는 “수익을 낼 생각은 없었고 의미 있는 책을 내자는 마음으로 계약을 했다”고 말했다. 2013년 11월이었다. 이듬해 반전이 일어났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이 뉴욕타임스에 ‘21세기 자본’을 소개하면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피케티는 국내 한 언론사 포럼의 강연자로 내한이 예정돼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저자한테 연락해 불어 원본이 아닌 영어본으로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번역자는 글항아리 사무실에 출퇴근하면서 몇 개월 만에 번역을 완성했다. 워낙 화제가 된 책이라 영어본을 번역한다고 말이 많았다. 서문은 불어 원본을 번역했고 감수도 이중 삼중으로 했다. 불어본과 영어본을 대조하는 팀도 별도로 만들었다. 그렇게 2014년 9월 책이 나왔다. 지금까지 13만부가 팔렸다.
그동안 글항아리에서 나온 책은 800종에 이른다. 그중에서 가장 아끼는 책을 꼽아달라는 부탁에 강 대표는 난감해했다. 굳이라는 말을 앞세우며 한 권을 꼽으라면 ‘일본의 굴레’라고 했다. 40년 이상을 일본에서 지낸 서양인의 눈으로 일본을 해부한 책이다. 많은 화제가 됐고 많이도 팔렸다. 강 대표는 “읽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서 좋은 책이라고 해준 유일한 책”이라고 했다. 의미와 성공이라는 이상적인 결과물을 안겨준 좋은 책이라는 의미다. 성공 여부를 떠나 그에게 어떤 책이든 아쉬움은 있었다. 개인사를 다룬 책은 언급된 다른 이들이 문제를 제기해 소동을 겪었던 일도 있었다. 전쟁 이야기를 다룬 책도 있었는데 번역 과정에 오류가 나오면서 초판만 내고 절판한 경우도 있었다.
그는 좋은 책을 내려고 한다. 거기에 더해서 잘 팔리면 더 바랄 게 없다. 하지만 좋은 책이 먼저라는 우선순위는 변하지 않는다. 그에게 좋은 책은 무엇일까. ‘사실과 진실 추구의 치열함’을 갖춘 통찰이 있고 남김없이 모든 것을 담는 책이라고 말했다.
“좋은 책은 한 주제에 대해 굉장히 폭넓은 간접 경험을 하게 해줍니다. 마치 자신이 그것을 실제로 겪은 것처럼 경험의 깊이를 부여해 주죠. 외부 충격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해 줄 튼튼한 외피를 마련해준다고 할까요. 이것은 일종의 거울 놀이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책 속의 상황에 충분히 몰입해 거울 놀이를 하고 나면 그런 상황이나 역할이 주어질 때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겠죠. 기본적으로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책이 좋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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