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이민에 로마·베를린까지... '글로벌 친일파'의 실체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12. 1.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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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진학문

[김종성 기자]

3·1운동이 확산되자 일제는 태세를 급전환했다. 식민지배의 기조를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면서, 교원과 관리의 착검 제도를 폐지하고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고 한국어 신문·잡지의 간행을 허용하는 등의 민심 수습책을 내놓았다. 이 역시 기만적인 식민지배정책이었다는 점은 친일파 진학문(1894~1974)의 은밀한 움직임으로도 증명된다.

일제는 3·1운동 5개월 뒤인 1919년 8월 12일 전 해군대신 사이토 마코토를 제3대 조선총독에 임명했다. 해군대신 재직 중에 뇌물 스캔들에 휘말려 사임하고 귀농을 준비하고 있던 사이토 마코토는 9월 2일 남대문역(서울역)에 내렸다가 강우규 의사의 폭탄을 맞을 뻔했다. 이때 무사히 살아남아 문화통치를 주도한 사이토 마코토에 관한 강동진(1925~86) 쓰쿠바대학 외국인교수의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는 진학문이 1919~1926년 사이에 사이토를 30회나 면회했다고 알려준다.
 친일 언론인 진학문
ⓒ 위키미디어 공용
일제 문화통치에 동조한 진학문

1993년에 <친일파 99인> 제2권에 실린 오미일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의 기고문 '진학문: 일제 문화정치의 하수인'은 "문화정치의 주요 핵심은 친일세력 육성과 민족운동 계열을 대립·분열시키는 것"이었다면서 "친일파 민원식에게는 <시사신문>을, 송병준에게는 <조선일보>를 허가하였다"라고 한 뒤 진학문이 총독부로부터 받은 미션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제는 민족운동권을 표면화시켜 그들을 감시권 내에 두고 또한 민족운동 계열을 분열시키기 위한 의도로 <동아일보> 창간을 극비리에 진행하였다. 민족계열 신문 창간 계획을 총지휘한 이가 <경성일보> 사장 아베였고, 그 중간에서 매개한 이가 바로 진학문이었다."

진학문이 총독을 30회나 면회한 이유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위 기고문은 동아일보사가 발행한 <동아일보사사(史)>에 인용된 진학문의 회고담을 들려준다. 회고담에서 그는 우사미 가츠오 총독부 내무국장(장관급)이 한국인 신문사 설립과 관련해 "한데 뭉쳐서 출원하지 그래"라고 자신에게 권했다고 말한다.

진학문은 내무국장의 말을 "출원자 전부가 한데 뭉쳐서라는 뜻이 아니라 민족주의세력이 한데 뭉쳐서라는 뜻이었다고 생각"했노라고 회고했다. 그런 비밀 지시에 따라 그는 한국인들의 언론사 설립에 대한 지원 활동에 나섰다.

일제가 한국인 언론·출판의 허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얻고자 했는지는 <사이토 마코토 문서>에 수록된 1922년 1월 24일자 서신에서 확인된다. 이 서한의 상세한 내용이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7권 진학문 편에 인용돼 있다. 진학문이 문인 최남선과 함께 관여한 또 다른 매체인 <동명>의 창간을 허용해주면 자국에 어떤 이익이 생길 것인가에 대한 일본인들의 논의를 이 서신에서 엿볼 수 있다.

"최남선의 잡지가 발행되면 일본의 건전한 출판물을 적당히 쉽게 조선어로 번역해서 소책자로서 알맞게 값싸게 팔아 출판업을 일으키게 해서 그것으로 조선 사상계의 악화를 구하고 또 진학문·이광수의 생활비의 출처로 삼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저의 생각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중략) 유생과 학생 간의 논쟁에 개입하여 그들끼리의 논전을 더욱 일으킨다면 사상 악화를 견제하게 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의 언론·출판을 허용하면 일본의 '건전 지식'이 한국어로 번역돼 한국인의 사상 '악화'를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식민지배에 필요한 인물들의 생활비를 보조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한국 지식인 간의 논쟁을 유발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했다. 일제가 문화통치라는 한층 교묘한 식민지배방식으로 제2의 3·1운동을 막고자 했고, 이를 위한 실행자로 진학문이 간택됐음을 알 수 있다.

진학문은 1894년 12월 4일 출생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진학문 편은 그가 경기도 이천 출신이라고 말하고, 위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는 본적지가 서울시 중구 을지로 2가 21번지라고 말한다.

그의 인생 궤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잦은 이동'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정리된 프로필에 따르면, 14세 때인 1908년 게이오의숙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중퇴했고, 서울 보성중학교를 졸업한 뒤인 1913년에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중퇴했고, 22세 때인 1916년에 도쿄 외국어학교 러시아문학과에 들어갔다가 이번에는 2년 뒤 중퇴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받은 훈장... 굵직한 친일 이력
 1930년대 중반 관동군사령부 소속 정보장교 쓰지 대위가 진학문에게 관동군 촉탁을 요청하면서 제시한 조건. 월 수당 300엔, 별도로 협화회 수당 200엔을 합쳐 매월 500엔을 제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비슷한 양상은 거주지 이동에서도 느껴진다. 학업 때문에 한일 양국을 자주 오간 그는 자신이 설립을 주도한 동아일보사의 정경부장·학예부장·논설위원을 맡았다가 6개월 뒤 갑자기 그만두고 도쿄-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가서 한동안 체류했다.

귀국 뒤 <동명> 편집인·발행인, <시대일보> 편집장, <호우지신문> 경성특파원을 지내던 그는 33세 때인 1927년에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1937년에는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내무국 참사관이 됐다.

만주국 참사관 근무는 그가 만주국의 사절 자격으로 로마와 베를린을 방문하는 기회를 갖게 만들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에 그가 히틀러 정권과 무솔리니 정권의 훈장을 받는 계기가 됐다.

<친일인명사전>은 "이해 5월에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에서 각각 훈4위 취(鷲)2등 공로장과 훈3등 왕관장을 받았다"고 말한다. 일왕(천황) 히로히토에게 충성하는 상태에서 히틀러·무솔리니의 훈장도 받았으니, 제2차 세계대전 '3대 악의 축'으로부터 모두 인정을 받은 셈이다.

3·1운동 직후에 언론 분야에서 총독부의 비밀 임무를 수행한 그는 1930년대 후반에는 조선과 만주 양쪽의 경제 분야에서 식민지배를 도왔다. 위 <친일파 99인>은 그가 일제의 공급망 국책회사인 만주생필품주식회사의 상무이사와 서울 담당 이사로 근무한 일을 거론하면서 "1930년대 말부터는 전시체제하 통제경제정책을 담당하는 관리자로서 일제에 기여"했다고 설명한다.

이 외에도 그는 굵직한 친일 이력을 많이 남겼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위 보고서에서 지금의 국회의원 비슷한 중추원 참의 경력 이외의 또 다른 반민족행위들을 이렇게 열거한다.

"1938년을 전후하여 만주국협화회 간부를 지냈고, 1940년 만주국협화회 수도계림분회에서 재만 조선인 교육사업을 위한 항구적 기구로 설치한 조선인교육후원회의 신경지역 위원 및 고문으로서 내선일체 교육 실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 1942년 만주국협화회 산하 조선인보도분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전시체제기 재만 조선인의 노무동원에 협력하였음. 또한 일제의 황민화운동을 적극 선전하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였음."

진학문은 중추원 참의와 만주국 고위 관료로 일했으므로 그가 거기서 얻은 수익은 친일재산이다. 그런데 그의 경우에는 뜻밖의 것도 친일 재산에 포함될 수 있다. <동아일보>에 글을 쓰고 얻은 수입이 그렇다.

위의 <사이토 마코토 문서>에도 언급됐듯이 총독부가 진학문에게 언론기관 설립 임무를 부여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거기서 생활 자금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가 지급해야 할 보수를 동아일보사 등이 지급하도록 했던 셈이다. 그래서 그의 경우에는 동아일보사 부장과 논설위원 등으로 일하고 얻은 수입도 친일재산이 될 수 있다.

그는 '친일재산'이 역사상 최악의 방법으로 인류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에 부역한 대가라는 점에 개의치 않았던 듯하다. 이는 그의 해방 이후 '미안함 없는' 행적에서 잘 나타난다.

1948년 정부수립을 즈음해 친일청산을 위한 국회 반민특위 구성이 가시화되자 그는 일본으로 달아났다. 그런 뒤 상황이 잠잠해지자 공식 활동을 재개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52년 한국무역진흥공사 부사장을, 1955년 한국무역협회 일본지사장을, 196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부회장을 지냈다"고 말한다. 언론 분야에서 친일을 하다가 전시경제 분야로 친일의 무대를 옮긴 것이, 해방 뒤 한경협(전경련) 부회장이 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1974년 2월 3일 80세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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