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눈먼 은행 재벌이 50년간 벌인 기막힌 일 [ 단칼에 끝내는 곤충기]
[이상헌 기자]
"엄마, 아빠, 나는 박물관을 만들거야..."
겨우 7살 먹은 로스차일드 남작의 말이다. 시오니즘 지도자로서 '밸푸어 선언'을 이끌어 낸 정치인의 진심이었다.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아더 밸푸어(Arthur J. Balfour)는 라이오넬 월터 로스차일드(Lionel Walter Rothschild)에게 서한을 보낸다. 밸푸어 선언이라 칭하는 이 편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 건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는 내용이다.
월터의 친구이자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이 되는 하임 바이츠만(Chaim Azriel Weizmann)이 함께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막대한 물자가 필요했기에 유대인 사회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야 했다. 밸푸어의 서신은 이스라엘 건국의 초석이었으나 근현대사를 거치며 중동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
▲ 거북이를 탄 월터 로스차일드. 런던자연사박물관 홈페이지를 장식한 라이오넬 월터 로스차일드. |
ⓒ Natural History Museum |
곤충에 탐닉했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세 인물에 대해서는 <관련기사: 역사에 남은 과학자의 남다른 제2의 관심사>에서 살펴봤다. 뒷날 조카인 미리엄 로스차일드는 큰아버지 월터에 대한 전기(Walter Rothschild: The Man, the Museum and the Menagerie)를 펴낸다.
각 분야의 전문가와 손잡고 세계를 누비다
라이오넬은 불혹의 나이에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는 40대에 만든 동물원과 20대에 설립한 박물관을 통해 전 세계로의 탐험을 시작한다. 이 기나긴 여정에는 그동안 모아 놓은 3만여 권의 조류학 서적을 갖춘 도서관이 함께 했다.
로스차일드 남작은 각 분야의 여러 전문가(탐험가, 수집가, 곤충학자, 박제사, 사서 등)를 고용하여 방대한 컬렉션을 구축한다. 평생에 걸쳐 약 400명의 수집가와 손잡고 48개국 이상에서 표본을 모았다. 그는 자연과학에 헌신하며 약 800개에 달하는 출판물을 펼쳐낸다.
▲ 노비타테스 조올로기카이(Novitates Zoologicae)의 박각시 삽화. 로스차일드가 세운 트링 박물관에서 55년 동안 출간한 동물학 저널. |
ⓒ Natural History Museum |
새는 하터트가 맡고 곤충은 조던이 책임지다
독일 함부르크 태생인 하터트는 1892~1929년 까지 박물관장이자 조류학 큐레이터로 활약했다. 로스차일드를 대신하여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박물관을 과학 교류의 중심지로 만드는데 힘을 다했다.
▲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비 패거리에 속하는 비단제비나비 표본. 날개편 길이가 30cm 정도로 커서 '새날개(Birdwings)'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
ⓒ 이상헌 |
덧붙이는 글 | 해당 기사의 사진은 글쓴이의 초접사 사진집 <로봇 아닙니다. 곤충입니다>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