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과 구국계몽운동의 기폭제, 민영환 자결
[정만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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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환, 그가 자신의 명함에 쓴 유서 |
ⓒ 국가보훈부 |
민겸호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군인들에게 피살되었다. 민영환은 큰아버지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는데, 민태호는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당 청년들에게 살해되었다.
민영환은 21세에 생부, 23세에 양부를 잃었지만 17세(1878년)에 급제한 인재인데다 왕실과 아주 가까운 인척이라는 출신 성분에 힘입어 출세에는 지장이 없었다. '온순하고 청렴하였으며 애국심이 매우 강했(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던 그는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에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어 개화정책을 지지하였다.'
아버지 민겸호와 큰아버지 민태호 모두 피살
민영환은 35세인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서 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고, 1897년에도 영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두 차례에 걸친 유럽 답사는 그에게 세계 각국의 선진 문물에 대한 안목과 미래사회의 추이를 예견하는 안목을 길러주었다. 민영환은 세계여행에서 얻은 견문을 바탕으로 고종에게 근대적 개혁과 민권 신장을 통해 독립국가로서의 기초를 굳건하게 다질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그의 건의는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세계 순방으로 얻은 안목, 국책 반영 불발
1898년 서재필,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가 민권자강운동을 펼치자 적극 지지하였다. 그는 의회를 두어 국민들의 여론을 결집시켜야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크게 유리하다고 생각한 당시 '가장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관료'였다.
그는 군부 대신 겸 내무 대신으로서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 운동을 적극 뒷받침했고, 이윽고 1898년 11월 2일 '의회 설립법'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고종의 속좁은 단견, 민영환 제거
하지만 '민영환이 독립협회와 공모하여 공화정을 실현하려고 한다'는 수구파의 모략선전에 넘어간 고종이 그를 파면하면서 의회 설립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복직해 참정 대신, 탁지부 대신 등을 역임했지만 한일의정서가 1 904년 2월 23일 강제 체결되는 데 강력히 반대하다가 시종무관장(청와대 경호실장)으로 좌천되었다.
그 이후에도 민영환은 친일 관료들과 맞섰는데,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로 국권이 사실상 일본에게 넘어갈 때에는 조병세와 더불어 수많은 관리들을 이끌고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주장했다.
을사오적 처형 주장, 고종 거부
그러나 고종은 민영환 등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영환은 대한문 앞에서 농성을 펼쳤지만 일제에 체포되어 끌려나오고 말았다.
11월 29일 풀려난 민영환은 나라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통감한 나머지 자결을 결심하였다. 그는 스스로 죽음으로써 국민들의 마음에 나라의 독립을 지켜내어야겠다는 각오를 격동시키는 밑거름이 되고자 했다.
그는 11월 30일 각국 공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과 국민들에게 보내는 〈경고 대한 2천만 동포 유서〉를 썼다.
아, 우리의 치욕이 이 지경에 다다랐구나. 생존경쟁이 심한 이 세상에 우리민족의 운명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맹세하는 사람은 살아 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나 영환은 죽음으로써 황은을 갚고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려 한다. 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황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형제여, 천만 배나 분려(奮勵)를 더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마음을 합하고 힘과 힘을 아울러 우리 자유독립(自由獨立)을 회복할지어다.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겠노라. 아, 조금도 희망을 잃지 말라.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한다.
유서 쓰기를 마친 민영환은 목을 찔러 자정 순국하였다. 그의 죽음과 유서는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데 큰 계기를 만들어 주고, 나라가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는 모범을 죽음으로써 가르쳐 주었다(공훈록).'
선생을 따라 전 좌의정 조병세, 전 대사헌 송병선, 전 참판 홍만식, 학부 주사 이상철 등도 자결, 순국함으로써 일제 침략에 대한 강력한 투쟁 방략의 하나로 의열 투쟁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나아가 선생의 순국은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구국 계몽운동이 발흥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죽음으로서라도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 (2001년 11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 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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