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플라스틱의 배신
플라스틱은 가열과 냉각만 거치면 어떤 형태로든 만들 수 있는 마법의 물질이다. 단어의 어원도 조형에 적합하다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 ‘plastikos’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상상을 현실로 이뤄주는 매력적인 소재지만 플라스틱의 위험성도 여기에 있다. 어떤 모습으로든 변화해 우리의 일상에 숨어들고 우리 삶을 잠식할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의류다. 10년 전만 해도 내게 옷과 플라스틱은 철저히 분리된 카테고리였다. 지금은 합성섬유 옷을 세탁할 때마다(혹은 입고 다니는 것만으로) 플라스틱 조각이 떨어져 나와 물과 공기에 쌓인다는 연구 결과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테르 같은 섬유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됐을 때, 옷 신발 가방은 물론 수세미 하나까지 환경파괴에 일조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충격이기보다는 조금 막막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인류가 직면한 위기는 ‘플라스틱이 만든 오염’이 아니라 플라스틱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플라스틱을 30년 넘게 연구한 전문가 나탈리 공타르도 2021년 저서에 비슷한 말을 남겼다. “플라스틱은 의도대로 사용된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플라스틱이 가진 성질 그 자체다.” 석유에서 뽑아낸 탄소 원자는 4개의 ‘손’으로 다른 분자나 원자를 끌어당겨 잡아두는 힘이 있다. 이 구조가 사슬처럼 연결된 것이 플라스틱이다. 공타르는 플라스틱 구조를 진주 목걸이에 비유하는데, 여러 개의 목걸이(사슬) 결합을 ‘중합체’라고 부른다. 온도가 올라가면 중합체 목걸이들 간 인력이 약해지면서 플라스틱이 무른 덩어리가 된다. 모양을 잡아 열을 식히면 다시 인력이 발생해 그 모양대로 굳는다.
목걸이들이 빽빽하게 얽혀 있는 고밀도 중합체는 산소나 습기를 차단할 수 있어 식품 포장용기로 각광받았다. 공타르 역시 1980년대에 식품 안전 이슈를 해결하지 못한 개발도상국으로 플라스틱 포장 기술을 전수했다고 한다. 전 세계가 플라스틱산업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정말 아무도 ‘사후 처리’는 걱정하지 않았던 걸까. 공타르는 플라스틱을 전파했던 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고백한다.
“비단, 나무, 철, 양모는 각각의 방식으로 결국 분해된다. 유리, 돌, 금속도 주성분인 칼슘, 철, 이산화규소 등으로 천천히 변해 물과 땅을 광물화한다. 가죽, 종이, 직물은 토양의 미생물이 소화시켜 미분자가 되고 식물 광합성을 통해 탄소 순환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인류가 항상 도움을 받았던 모든 재료들과 플라스틱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인류가 플라스틱의 배신을 알아챈 건 1990년대에 들어선 이후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쌓이면서 이들이 조각날 뿐 썩지 않는다는 섬뜩한 사실이 드러났다. 나노미터 크기로 축소된 뒤에도 플라스틱을 이루는 목걸이 구조는 깨지지 않는다. 플라스틱은 공타르의 표현대로 ‘지구화학적 순환에 포함되지 않는 예외적인 재료’였다.
플라스틱의 유연성, 강도 등을 위해 중합체 사슬 사이에 끼워 넣은 ‘가공제’도 새로운 위협으로 떠올랐다. 비스페놀A처럼 인체에 유해한 가공제가 플라스틱에서 식품으로, 플라스틱에서 자연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발견됐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중합체는 사용과정에서 닿는 음식물 등 오염물질을 흡수하는 성질도 있다. 이를 완벽하게 제거하기 어렵다보니 폐플라스틱 재생원료와 새 플라스틱을 섞어 제품을 만든다. 플라스틱을 수거해 같은 용도와 같은 형태로 100% 재활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얘기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60년 세계 플라스틱 사용량이 3배 증가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수십년 전 생산된 플라스틱이 이제야 미세 플라스틱으로 발견되는 것을 고려하면 앞으로 마주할 플라스틱의 양은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국제사회가 플라스틱 전 주기 관리를 위한 국제협약을 제정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 협상 회의는 지난 25일부터 부산에서 진행 중이다.
실질적 협약을 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다만 이 과정이 ‘플라스틱은 없어선 안 되는 필수품’이라는 믿음, 고작 수십년 사이에 인류에 뿌리내린 사고방식에 균열을 일으키길 기대한다. 이토록 친밀한 플라스틱,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끝내 재앙으로 기록되지 않도록.
박상은 사회부 기자 pse0212@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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