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대 '래커시위'? 그런 관심 필요 없다
[유영주 기자]
▲ 지난 19일 서울여대에서 열린 성범죄 교수 규탄 행진에서 학생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피켓에는 '서울여대는 네 룸살롱이 아니다'라고 적혀 있다 |
ⓒ '무소의 뿔' SNS |
시위가 초기부터 언론의 관심을 받은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학교 내부에서만 이야기가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반대 시위와 시기가 맞물리면서, 우리 학교 역시 주목받게 됐다. 학교를 붉게 물들인 '래커' 역시 눈길을 끄는 데 한몫했다. 굵직한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학교와 시위 현장을 사진 찍고, 학우들을 인터뷰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학교도 시선이 쏠리자 부랴부랴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새로운 형국을 맞이했다면서, 나를 비롯한 학생들은 언론을 반겼다.
그러나 갈수록 보도의 행태가 이상하게 흘렀다. 대부분의 기사가 래커에만 초점을 맞췄다. 래커칠은 목소리를 내는 방식 중 하나일 뿐임에도, 헤드라인에 '붉은 래커'가 강조된 기사가 쏟아졌다. 기사의 주어는 '피해 학생 보호와 범죄 재발 방지에 소극적인 학교'가 아니라 '래커칠 하는 학생'이었고, 정작 시위의 본질인 시위의 원인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몇몇 기사는 우리 시위를 '갈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성범죄자 교수와 피해 학생, 가해자가 피해자가 명확한 사안에 항의하는 데 갈등 따위의 '중립 기어' 표현을 쓰는지 의문이 들었다.
언론이 부수적인 요소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사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자, 여론도 이상한 방향으로 향했다(혹은 여론과 언론, 서로가 서로를 격려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가해자가 이미 성범죄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피해자를 '꽃뱀'이라고 욕하는 2차 가해 댓글이 달렸다. 비난 수위가 높은 댓글 창에 학생들이 나서서 '댓글 정화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남초 커뮤니티는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여성혐오적 단어들로 학생들을 욕했다. 래커칠을 지우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들지 시시덕대거나, 학교 측이 학생들에게 배상을 청구해 '참교육'해야 한다고 떠들기도 했다.
▲ 서울여대 래커시위 17일 오후 서울 노원구 서울여대 50주년 기념관 일대에 성범죄 OUT 등의 항의 문구들이 래커로 칠해져 있다. |
ⓒ 연합뉴스 |
들고 래커를 지우려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 그럼에도 자꾸만 래커에 대한 기사가 나오니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러한 난장판이 벌어진 데 언론의 책임은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안전한 학교를 원하는 재학생으로서, 젠더 폭력에 대항하는 여성으로서, 살아남은 당사자이자 그들의 연대자로서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언론을 거치는 순간, 우리의 목소리는 '여대생'의 목소리로 납작해졌다. 뒷일은 모르겠고 일단 신이 나서 래커칠을 해대는 여대생 말이다. 이쯤 되면 언론(press)인지, 그저 사안을 삼키기 좋게 짓누르는 프레스기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다.
통탄스럽게도 들끓는 사안들 속에서 서울여대 시위는 이미 기름이 까맣게 눌어붙은 불판이 돼 버린 듯하다. 이젠 래커칠의 피해액 규모가 얼마일지 왈가왈부하는, 사회면의 탈을 쓴 가십성 기사들만 가끔씩 나온다.
지난주 가해자는 교수직에서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피해자 보호와 재발 방지 대책에 대해 학교는 아직도 침묵하고 있다. 학교가 움직이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 목소리를 낼 것이다. 언론은 이제부터라도 학생들의 '왜'와 학교의 '어떻게'에 집중해달라. 우리가 왜 건물에 래커칠 했는지 제대로 전달하고, 학교가 남은 과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감시해달라. 그 외의 관심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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