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는 권양숙을 배워라? 盧·尹 스타일부터 따져봐야

이장규, 손병수, 박유미 2024. 11. 27. 05: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건희 여사와 권양숙 여사. 대통령실

대구시장 홍준표는 지난 10월 중순 자신의 SNS를 통해 하필이면 권양숙을 거론하고 나섰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를 두고 노무현의 부인 권양숙 여사의 처신을 배워야 한다며 정치 훈수를 둔 것이다. 아래와 같다.

「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장인의 좌익 경력으로 곤욕을 치른 후 대통령이 된 이후에 권양숙 여사는 5년 내내 공개활동을 자제하고 언론에 나타나지 않았다. 보수 우파 진영에서도 노 대통령 임기 내내 권 여사를 공격하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기인한다. 지금 대통령의 국민 지지가 퍼스트레이디의 처신이 그중 하나의 이유가 된다면 당연히 나라를 위해서 김 여사께서는 권 여사같이 처신하셔야 한다.

대체 무슨 이유로 홍준표는 이 시점에서 현직 대통령의 아내에게 과거 대통령 노무현 아내의 처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일까.

2022년 6월 13일 김건희 여사가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에서 권양숙 여사를 예방하고 있다. 대통령실

노무현 스토리를 풀어가는 마당에 이래저래 그의 아내 권양숙에 관한 이야기를 생략하기 어렵다. 권양숙이 박연차 관련 비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대 사건은 이미 만천하에 알려진 사실이다. 새삼 되풀이할 의도가 없다. 다만 홍준표의 말처럼 청와대 안주인의 처신이 국정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 이르렀다면, 롤 모델로 치켜세운 노무현 시대의 퍼스트레이디에 대해 따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여정부 대통령의 아내 권양숙의 청와대 5년은 시종일관 조용했다. 남편인 대통령의 내조나 봉사활동 등에만 참여했다. 뉴스거리가 없었다. 바로 그 점을 두고 홍준표가 지금의 대통령 아내더러 본받으라고 한 것이니, 결국 '뭘 하는 걸' 본받으라는 게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배우라는 이야기였던 셈이다.

2005년 5월 5일 청와대 대정원에서 열린 어린이날 특집 생방송에 함께 출연한 노 대통령 부부. 중앙포토

김건희와 권양숙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기 전의 일들로 인해 발목이 잡혔다는 점이다. 특검 운운하며 지겹도록 문제가 되는 도이치모터스 사건이나 공천 개입 등에 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과거의 일인데, 지금도 속을 썩이는 거다.

권양숙은 아무 일이 없었나. 그렇지 않다. 권양숙에게도 남편이 대통령 되기 전의 일로 집권 초반 아슬아슬한 고비가 있었다. 2003년 5월께의 일이다. 대통령의 아내 권양숙이 남편 몰래 검찰총장 송광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총장님이 한번 청와대에 들어오셔서 저하고 상의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 " 저희들이 혹시 수사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청와대에 들어가서 상의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 "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
무슨 일이었기에 이런 대화가 전화로 오갔던 것일까. 대통령 노무현은 개혁의 팡파르를 우렁차게 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작부터 말 못할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청와대 입성 전의 일이지만 장수천 물 사업의 후유증이 뒤늦게 불거진 것에 더해, 형 노건평이 개입된 거제도 국립공원 용도변경 사건까지 터졌다. 뒤늦게 언론에 터지기 시작하자 겁이 난 권양숙은 불쑥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안을 당한 것이다. 결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해명 겸 사과 회견(2003.5.28)까지 해야 했다. 권양숙 관련 여부도 얼렁뚱땅 묻혀서 넘어갔다. 아무튼 검찰 수사는 거제도 땅 문제로 수사를 확대하지 않았다.

이처럼 퍼스트레이디가 되고 난 뒤, 되기 전의 일 때문에 곤욕을 치렀거나 지금도 치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한테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굳이 따지자면 청와대 입성 후 검찰총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던 권양숙 쪽이 더 심각한 케이스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야당에서도 이런 의혹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두 ‘아내’의 확연한 차이는 대통령의 부인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김건희의 행보는 “조용히 내조에 전념하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대통령 아내 관련 뉴스가 끊이질 않는다. 3대 정권에 걸쳐 대통령 전속 사진작가였던 장철영은 “미국 순방 때 방명록에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라고 쓰는 걸 보고 의아했다”며 “보통은 대통령 이름 밑에 여사 이름만 적는다”고 했다. 대통령실(청와대)의 남편과 아내는 그야말로 동급임을 말해 주는 단적인 예다.

지난해 4월 미국을 국빈 방문 중에 김건희 여사가 윤석열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명록을 쓰고 있다. 좌측 하단은 방미 당시 작성한 방명록. 중앙포토ㆍ대통령실


권양숙의 처신은 달랐다. 초장에 혼이 난 권양숙의 청와대 생활신조는 그야말로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집권 내내 뒤에 있었다.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 라스트 레이디라 할 정도로 몸을 사렸다. 남편의 국정에 끼어드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원래 남편이 바깥 일에 몰두하는 나머지 다른 일에는 무심한 스타일이었기에, “아내는 집안일이나 자식 교육 문제에 전념해야 한다”는 생각이 평생 머리에 박혀 있었다.

권양숙의 성격이나 스타일이 그렇기도 했지만, 남편 노무현 또한 아내가 바깥 일에 끼어드는 것을 한치도 용납하지 않았다. 비록 연애결혼은 했어도 전형적인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지닌 구식 남자였다. 권양숙 또한 그런 남편을 받들면서 가정을 꾸려 왔던 전형적인 가부장형 아내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청와대 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정의 지배구조, 청와대로 이어져

잠시 옛날의 권양숙으로 돌아가 보자. 권양숙은 노무현과 한 동네 소꿉친구로 자라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고, 역시 가난한 집안이었다. 말이 좋아 고시 준비생이었지, 결혼 당시의 남편 노무현은 팔자 좋은 동네 건달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노무현은 아내에게 군림하는 남편이었고, 권양숙은 그런 사내를 남편으로 모셨다. 노무현은 훗날 자서전을 통해 솔직히 털어놓고 사과했다.
“나는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평하면 소리를 질러댔고, 그 말에 심하게 반발하면 다시 손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정말 기억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은 고시 공부 한답시고 모내기하는 날에도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으면서, 시부모 모시고 농사일로 고생하는 아내에게 수 틀리면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었음을 숨김없이 고백한 것이다.

애당초 권양숙은 정치인 남편을 원치 않았다. 정치 입문을 반대했다. 어려서부터 가난에 진저리가 났기에 남편에 대한 기대 또한 경제적 안정이었다. 세무 전문 변호사로 돈 잘 벌 때가 가장 행복했다.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고, 아이들 교육비도 넉넉히 썼다. 그러나 노무현은 결국 운동권 변호사로 나섰고, 급기야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후 가정경제로부터 갈수록 멀어져 갔다. 정치다 운동이다 하며 밖으로만 나돌았고, 집안 살림에는 무심한 왕년의 남편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권양숙도 고집이 있고 성격이 강한 타입이었다고 하나 남편 노무현의 성정을 이기지는 못했다. 남편의 고함 한마디면 그만이었다. 젊었을 때의 노무현은 그런 자신의 남자다움(?)을 친구들에게 자랑이랍시고 떠벌리고 다녔다.

원래 노무현이 유명 정치인이 아니었듯이 그의 아내 또한 무명의 가정주부였다. 세간에 처음 노출된 것은 아버지가 좌익운동을 하다가 붙잡혀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사했다는 사실이 대통령 선거 유세기간 중에 알려지면서였다. 사실이었고 새로운 뉴스도 아니었다.

1994년에 발간된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이미 그러한 사정 탓으로 결혼에 큰 애로를 겪었음을 스스로 밝힌 바 있었다. 어쨌거나 소위 “빨갱이의 사위”라는 점이 선거 중에 부각되는 것은 대통령 후보에겐 부담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특유의 대응으로 돌파해 나갔다.

“제가 그러면 제 아내를 버리기라도 해야 합니까.”
이 한마디로 오히려 노무현의 지지도는 올랐다. 색깔 논쟁은 발도 못 붙인 가운데 아내를 지키는 당당함이 오히려 돋보인 형국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아내 리스크를 극복하고 청와대행에 성공했고, 권양숙은 청와대의 안주인이 된다.

2006년 핀란드 순방 당시 권 여사가 노 대통령의 옷 매무새를 만져주는 모습. 사진 장철영


돌이켜 보면 노무현과 권양숙 사이의 ‘지배구조’는 서로가 오랫동안 익숙해 있던 것이고, 권양숙의 청와대 생활도 그 범주 안에서 꾸렸던 셈이다. 구태여 청와대 안이냐 밖이냐를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대통령 노무현의 리더십은 아내 권양숙에게 가장 먼저 빛을 발했는지 모를 일이다. 가정에서의 리더십 말이다.

과거에도 대통령의 부부관계는 대통령 이전이나 이후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든, 안 되든 간에 두 부부 사이에 존재해 왔던 리더십이 청와대 분위기를 결정해 왔던 것이다.


“주가 올려” 들볶은 영부인도

그렇다면 오늘날 ‘대통령의 아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아내들에게서 실마리를 찾으려 할 게 아니라 남편들인 노무현과 윤석열 대통령의 비교 분석에서 해법을 찾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겠나. 역대 대통령의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역대 영부인 사진. 왼쪽 뒷줄부터 시계 방향으로 권양숙ㆍ이희호ㆍ손명순ㆍ프란체스카ㆍ 김윤옥ㆍ김옥숙ㆍ 육영수ㆍ이순자 여사. 중앙포토


남편인 대통령의 판단이 흐려지고 아내가 나설 때 문제가 생겼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도 평생 남편을 뒷바라지한 훌륭한 내조자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노쇠하고 판단이 흐려지면서 아내와 영어가 잘 통하는 박마리아의 남편 이기붕을 중용, 화를 부른 것이다.

노태우의 아내 김옥숙의 입김은 처음부터 대단했다. 오빠 김복동이 전두환 체제의 한 축이었을 뿐만 아니라 김옥숙의 기를 남편 노태우도 어쩌질 못했다. 자신이 산 주식이 떨어지자 주가 부양책을 쓰지 않는다고 남편을 들볶았고, 결국 재무장관이 나서서 돈을 찍어서라도 투자신탁회사가 주식을 사들이도록 하는 어처구니없는 정책이 나오게 된다. 물론 실패로 끝난 정책이었다. 후임 경제수석은 부임 후 노태우의 부탁으로 영부인 김옥숙을 주기적으로 찾아가서 경제 현안들을 직접 이해시켰다.

결국 대통령 아내의 역할이나 활동 범위는 남편인 대통령의 주견이 어떤가에 달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대통령의 부인은 명예직 공인”이라는 노무현의 말(권양숙의 제2부속실장 이은희)이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아무튼 부부간의 ‘지배구조’라는 표현이 어떨지 몰라도, 평생을 살아온 부부 간의 관계는 최고 권좌에 올라가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아무래도 대구시장 홍준표가 “김건희 여사가 권양숙 여사를 배워서 처신하시라”는 조언은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소치가 아닐까 싶다. 노무현 부부의 지배구조와 윤석열 부부의 지배구조가 워낙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권양숙과 김건희의 차이를 덧붙이자면, 두 사람은 관심사가 달랐다는 점이다. 권양숙은 원래 정치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집안 살림이 주된 관심사였다. 어렵게 살아왔던 환경 탓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김건희는 정치에 관심이 많고 자신의 네트워크도 넓었다. 이것 또한 생장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성공한 노무현, 실패한 노무현 - 아래 링크를 통해 더 많은 기사를 만나보세요.

▶ 성공한 노무현, 실패한 노무현
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49

“이회창보다 정몽준 대통령” 盧 단일화 승부, 자신을 버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9668

강금실 “난 ‘죽었구나’ 싶었다”…노무현-평검사 115분 맞짱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6129

“자신을 버려 폐족을 구하다” 盧 스스로 쓴 가혹한 판결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9664

“돈 없이는 정치할 수 없나”…술 먹던 노무현, 펑펑 울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9681

노무현이 만든 ‘인터넷 청와대’…文정부서도 끝내 외면당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1410

이장규 기자 lee.changkyu@joongang.co.kr, 손병수 기자 sohn.byoungsoo@joongang.co.kr, 박유미 기자 park.yumi@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