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려고 한 말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강현숙 작가의 교인 풍경-15]

우성규 2024. 11. 2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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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만 슬퍼하고 내일부터 슬픔은 끝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60대 후반이신 D 권사님은 항암치료를 받는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 교우들이 남편 집사님을 위로하기 위해 심방을 갔지요. 예배를 드린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구역장님이 남편분에게 “집사님! D 권사님은 천국 가셨으니까, 오늘까지만 슬퍼하고 이제 내일부터는 슬픔 끝입니다. 교회 열심히 나오세요. 그게 천국 가신 D 권사님이 원하시는 거예요”라고 하였지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슬픔의 무게

구름이 많이 모여 있어
그것을 견딜 만한 힘이 없을 때
비가 내린다.

슬픔이 많이 모여 있어
그것을 견딜 만한 힘이 없을 때
눈물이 흐른다.

밤새워 울어본 사람은 알리라
세상의 어떤 슬픔이든 간에
슬픔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눈물로 덜어내지 않으면
제 몸 하나도 추스를 수 없다는 것을

-이정하-

이 시의 내용에서 보듯이 감정, 특별히 사별처럼 관계의 상실을 경험한 분에게 ‘이제 슬픔의 감정을 그만 느끼시라’라고 말한다고 해서 감정이 정리되고 그런 건 아니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해서 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 ‘하나님이 OO를 곁에 두고 싶으셨나 봐요.’, ‘힘내. 그렇게 고통스럽게 지내기보다는 고통 없는 하늘나라가 더 나을 수 있어.’, ‘그만 울어. 아버지 천국 가셨잖아.’ 대략 이런 식의 말들입니다.

과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우리의 마음이 어떤지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OO를 하나님 곁에 두고 싶어 하신다고요.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염치없는 분이 아닙니다. 더욱이 아버지가 아무리 좋은 천국에 가셨어도 사별 가족은 아버지와 이 땅에서 오래오래 있고 싶은 마음이 더 클 겁니다.

거기다가 천국에 갔으니까 울지 말라니요. 천국에 간 건 맞지만 다시는 이 땅에서 볼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참을 수 없는 슬픔이 올라오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그래서 슬플 때는 맘껏 울어야 합니다. 울음이 나오면 울고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이 올라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억누르지 말고 표현해야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내 곁을 떠난 사람이 여전히 그립지만 그래도 마음을 추스르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감정을 표현하는 애도가 중요한데,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관계의 상실로 인해 생기는 감정인 슬픔에는 다양한 내용의 감정들이 혼합되어 있다는 겁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를테면 슬픈데 그 슬픔이 분노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엄마를 좀 더 정성껏 돌보지 못한 가족이나 의료진, 나아가 하나님 때로는 죽은 사람에게조차 분노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엔 불안이나 절망의 감정으로 슬픔이 표현됩니다. 이 말은 어린 자녀들을 두고 배우자가 떠나갔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절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는 분도 보았습니다. 이분은 남편이 출근하기 전에 다투었는데 그날 퇴근길에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남편과 다투었던 걸 반복해서 후회하다 보니 후회의 감정이 죄책감으로 바뀐 겁니다.

이럴 때 “남편의 죽음은 단지 교통사고일 뿐이에요”라고 섣불리 말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상대방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이든 그 감정을 충분히 표현해낼 수 있도록 그저 옆에서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처럼 상실로 인한 슬픔의 감정에는 오직 그리움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내용의 감정으로 슬픔이 표현된다는 걸 기억하면서 사별 가족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때는 자신의 말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건 아니고 이 상황을 뭔가 성경적으로 해석하면 좀 더 위로를 받지 않을까 해서 한 말일 겁니다. 그렇더라도 말은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천국 갔으니까 울지 말라’며 감정 표현을 막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보다는 사별 가족이 상실로 인한 슬픔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해낼 수 있도록 어떤 식으로든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슬픔의 감정을 덜어낼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비탄과 애도의 과정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위로를 건네면 좋을까요. 성경 구절이나 그럴듯한 멋진 말보다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위로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장례식장이나 애도 과정에 있는 교인을 찾아가는 일 그 자체가 큰 위로가 됩니다.

따라서 ‘어떤 말을 할까’에 너무 신경 쓰기보다는 사별 가족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면서 고개를 끄덕여주고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손 한 번 꼭 잡아주거나 안아주면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왜냐면 올라오는 감정을 허공을 향해 소리치듯 아무렇게나 마구 토해낼 수도 있지만, 누군가 옆에서 함께하며 들어줄 때 더 큰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도의 여정에 함께 하는 사람을 특별히 ‘동반자(companion)’라고 합니다.

슬픔의 감정을 비교하거나 판단하는 건 금물이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양한 관계의 상실을 경험한 교우들이 슬픔의 감정을 잘 털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애도의 과정을 도와야 합니다. 충분히 애도하지 않으면 상실로 인한 슬픔의 감정은 다 낫지 않은 흉터가 다시 덧날 수 있듯이 문득문득 뜻하지 않은 순간에 사별 가족을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느 선교사님은 3년 전 한국에서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선교지로 가셔서 바쁘게 보냈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오셔서 그제야 엄마의 유품들을 하나씩 정리하였는데, 몇 날 며칠을 울었다고 하면서 그 말을 하는 도중에도 울먹였습니다. 아마도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허겁지겁 선교지로 돌아가 선교사역에 집중하느라고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기억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슬픔을 비교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가령 장례식장에 갔을 때 사별 가족 중 OO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비난 조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갓 결혼한 며느리인데 너무 과하게 슬퍼하는 거 아니냐며 사별 가족이 표현하는 감정조차 비교하고 또 옳고 그름으로 평가하려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을 경험하는 방법이 다 다르듯이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실을 경험하고 그래서 표현되는 슬픔의 방식도 서로 다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막상 가까운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별 가족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또 애도 과정 중에 있는 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서 마음은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위로’가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집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권사님은 혼자가 아니에요. 언제든 연락 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받거나 아니면 음식을 해서 가져다줄 때 위로가 되고 또 실제로 자신이 혼자가 아니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애도 과정 중에 있는 교인들을 도울 수 있는 의례라 할까요. 추모예배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건 각당복지재단에서 매년 6월에 드리는 공동추모예배에서 힌트를 얻은 것인데요, 이를테면 교회의 규모나 형편에 따라 3개월, 6개월 혹은 1년에 한 번 ‘추모의 날’을 정하여 공동추모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개별적으로 고인을 추모하고 싶은 가족이나 교인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린 후에는 2부 순서로 참여자들이 돌아가면서 고인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요. 사전에 고인이나 고인을 추억할 수 있는 사진 같은 것들을 준비해서 영상으로 띄우는 것도 좋을 겁니다.

이를테면 어머니를 추억하며 딸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다음 해 추모의 날에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나눌 수도 있을 겁니다. 때로는 함께 참여한 다른 교인들이 고인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나누거나 딸이 알지 못했던 고인의 긍정적인 모습을 말해준다면 어떨까요.

이런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이유는 관계의 상실은 어떤 상실이든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그걸 그래도 견딜만한 기억, 나아가 고인을 새롭게 추억하는 것이 애도 과정이기에 이렇게 하면 사별 가족들은 애도 과정을 좀 더 수월하게 건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강현숙 작가, 치매돌봄 전문가, ‘오십의 마음 사전’(유노책주) ‘치매지만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생명의말씀사) 저자

편집=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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