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이 귀하다면, 이 사람들을 귀하게

월간 옥이네 2024. 11. 23. 10:2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쌀, 밥, 삶 ②] 청산면 장위리 유근희 농민 이야기

또 '쌀'을 말합니다. 풍요의 상징인 가을의 누런 들판에서 한숨 내쉬는 농민들을 알기에, 감당하기 벅찬 이야기를 전합니다. "밥 한 공기 300원 보장"이란 농민의 요구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관철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기사는 <월간 옥이네> 11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자말>

[월간 옥이네]

 충북 옥천 청산면 장위리 유근희씨.
ⓒ 월간 옥이네
충북 옥천군 청산면 장위리, 20년 경력의 베테랑 농부 유근희(64)씨의 하루는 새벽부터 시작된다. 1만5000평의 논을 아내와 단둘이 관리하고 또 제때 수확하려면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눈을 뜨면 벼 건조기가 있는 창고에 가서 마른 벼 낱알을 꺼내고 기계 청소, 아직 건조를 기다리고 있는 벼를 건조기에 넣는다. 오전이 지나고 오후가 되면 다시금 수확을 기다리는 논으로 향하는 것이 수확철의 일상이다. 다만 비가 오는 날은 작업이 어렵기에 강제로 쉴 수밖에 없다. 비가 오던 10월의 어느 오후, 유근희 씨를 찾았다.

나의 농사 소개
 충북 옥천 청산면 장위리 유근희씨.
ⓒ 월간 옥이네
유근희씨가 이곳에서 농사를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 1991년 고향인 장위리에 돌아와 부모님의 농사를 물려받았다. 친환경농법을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인데 현재 짓고 있는 1만5000평 규모의 벼농사 중 6000평은 친환경농법, 나머지 9000평은 관행농법으로 한다. 이외에 그가 관리하는 다른 이 소유의 논밭까지 포함하면 3만7000평 규모에 이른다.

"친환경농법으로 하려면 화학비료를 쓰지 못하고, 잡초 제거 등에 아무래도 손이 더 많이 가니까 전부 규모를 우리 인력으로 하기엔 무리가 있지요. 올해 수확 남은 것은 2000평 정도 돼요. 사흘 정도만 더 고생하면 되니까 거의 다 했네요(웃음). "

올해 그의 벼농사는 평년작, 수확량은 예년과 큰 차이가 없는 정도다. 다만 "벼의 알곡이 지난해보다 작고 깨씨무늬병, 잎마름병이 있는 것을 보아 토양에 양분이 충분치 않았던 것 같다"고 그래도 "병충해와 도복 현상이 벼가 다 익은 후에 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말하는 유근희씨.

"강한 비바람에 볏대가 넘어지는 걸 '도복 현상'이라 합니다. 벼가 다 익기 전에 도복이 되면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데, 익은 이후의 도복은 일으켜 세우지 않고 콤바인으로 수확이 가능해요. 일으켜 세웠어야 한다면 보통 작업이 아니죠. 병충해 피해도 깨씨무늬병, 잎마름병이 있긴 했지만 알곡이 다 익은 시점이어서 다행히 실질적인 피해는 크지 않았어요."

친환경농법 쌀 품종은 알찬미, 관행농법 쌀은 참드림 품종을 재배한다. 알찬미는 추청(일본 쌀 품종인 아키바레)을 대체하고자 2018년 경기도 이천시에서 개발된 품종으로 단단하고 찰진 것이 특징이다. 참드림 역시 경기도농업기술원에서 개발한 우리나라 품종 쌀로 삼광벼와 토종벼 조정도를 교배한 품종이다. 맛은 부드럽고 찰진 편이다.

영농일지
 충북 옥천 청산면 장위리 유근희씨.
ⓒ 월간 옥이네
그가 매년 기록한 영농일지를 통해 3월부터 10월까지, 그간의 수고가 오롯이 담긴 벼농사 과정을 그의 일지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었다.
3.15. 종자 탈망 작업 실시
4.12. 볍씨 침종(온탕 소독 후)/ 못자리 하우스로 상토 운반
4.17. 볍씨 파종 후 상자 쌓기(11명 투입)
4.21. 모판 상자 바닥에 깔기
4.25. 친환경 밀퇴비가 나와 128포 수령 후 보관(트리플 플러스)
5.11. 상자 처리제 토충왕 20포를 수령해 왔다
5.17. 밀퇴비 배정량을 전면 살포 후 로타리 작업을 하였다
5.20. 물대기 작업을 하였다
5.21. 트랙터 물 로타리 작업을 하였다
5.25. 상자처리제를 뿌린 후 모이앙 작업 실시
5.27. 배수로 정비 후 우렁 배정량 114kg을 가져와 방사하였다
6.3. 우렁이가 물에 묻힌 벼를 다 뜯어먹어 모 보식작업을 연이어 3일 하였다. 그리고 황새가 우렁이를 잡아먹어 황새 쫓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6.19. 940번지 내 잡초가 너무 많아 용역에서 2명을 얻어 수작업으로 작업하고 논두렁예초작업을 하였다
6.25. 논두렁 예초작업 실시
7.5. 가지가 적정량 빈 것 같아 중간 물떼기 작업을 하였다
7.13. 단지 1차 공동방제 실시 응애노 노피엠 라이징 혼용 드론 방제
7.25. 논두렁 예초작업을 하였다
7.28. 배수로 정비 후 물을 대고 걸러대기 실시
8.9. 단지 2차 공동방제 실시 충잡아 프리미엄+노피엠+라이징 혼용 살포
8.17. 740번지 753번지 우렁이가 다 제거하지 못한 잡초가 많아 2일에 걸쳐 낫으로 제거를 하였다
8.26. 논두렁 예초작업을 하였다
9.19. 전 필지 물떼기 작업을 하였다
10.8. 탈곡작업을 하여 건조 후 창고 보관

수확을 마친 지금, 중요한 작업은 탈곡·건조한 나락을 수매하는 일이다. 수매는 친환경쌀의 경우 전량 옥천군 공공급식용으로 청산농협에서 담당하고, 관행쌀의 경우 일부는 정부양곡(공공비축미곡) 수매로, 나머지 생산량은 옥천 내와 타 지역 식당에 직거래한다.

"지난해 기준으로 공공급식용으로는 11톤, 정부수매용 공공비축미에는 5톤 정도 보냈어요. 이렇게 보내고 남는 2~3톤 규모의 관행농 쌀은 옥천, 영동 식당에 직거래로 보내고 우리 먹을 것 남겨 놓고 그래요. 정부수매를 하면 우선지급금 40kg당 4만 원 먼저 받고 12월에 차액을 추가로 받아요."

정부수매가는 수매량이 너무 넘치거나 부족할 것을 대비해 수매 이후인 12월에 정해지는데 최종 수매가가 어떻게 정해질지는 그때가 될 때까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벼 수확량과 정부 사정 등 변수 요인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친환경농업 수매가는 관행농 생산 쌀 특등가보다 30% 높은 가격으로 책정된다.

"매년 조금씩 수매가가 달라집니다. 지난해 수매가는 40kg당 7만120원이었고, 지금껏 평균 6만5000원 정도 됐던 것 같네요."
 2012~2023 공공비축미 매입가 변화 추이. 자료 출처는 농림축산식품부.
ⓒ 월간 옥이네
공공비축제도는 정부가 일정 분량의 쌀을 시가로 매입해 시가로 방출하는 제도로, 쌀 수급을 시장기능에 맡기면서도 적정한 재고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했다. 2005년 이전까지는 정부가 정한 가격(시장 가격을 웃도는 정책 가격)에 쌀을 매입하는 추곡수매제도를 이용했다. 유근희씨는 "생산자 입장에서 수매처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상당한 안정감을 준다"면서 "단순히 수매가가 높게 책정됐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 적당한 가격에 충분한 매상량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수매처가 정해져 있지 않으면 생산자가 직접 판로를 개발해야 하는데, 이게 보통 부담이 아니지요. 생산자는 어찌 되었든 생산된 물량을 처리하는 게 중요하니까 정부의 공공수매 역할이 커요."

왜 쌀값은 오르지 않을까
 충북 옥천 청산면 장위리 유근희씨.
ⓒ 월간 옥이네
그가 20년 이상 벼농사를 짓는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는 기계도 소형에서 중대형으로 변화했고, 벼 품종도 기존 삼광, 추청에서 알찬미, 참드림 등 개량된 품종으로 바뀌었다. 농자재와 인건비, 농사에 들어가는 각종 비용도 큰 폭으로 올랐고 사람들의 식습관도, 생활 양상도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쉽사리 바뀌지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쌀값이다. 실제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쌀 20kg 소매가격은 2003~2008년 평년가가 4만5212원, 2018~2023년 평년가가 5만2398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저임금위원회 발간 '임금실태조사보고서'에 나타난 2003년 최저임금이 2275원, 2023년 9620원으로 증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차이를 실감해볼 수 있다.

"각종 농자재나 인건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다 올랐죠. 그런데 쌀값은 큰 변화가 없으니까. 타산이 안 맞으니 지금 상황에서는 쌀농사 지어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에요."

쌀농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자꾸만 올라가지만, 식문화와 식습관 변화로 쌀 소비량은 점차 줄어가는 상황이다. 여기에 한 해 수입되는 밥쌀만 40만 톤이 추가되니 곡식 창고에 쌀이 자꾸만 쌓여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쌀값은 큰 숙제다.

우리나라 농업은 쌀 생산에 집중돼 있는 양상을 보인다. 2023 농림축산식품 주요통계 자료를 보면, 2022년 식량작물 생산면적 90만7000ha 중 미곡 생산면적이 72만7000ha로 전체 면적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1980년에는 식량작물 생산면적이 198만2000ha, 미곡 생산면적이 123만3000ha로 지금의 2배 이상의 규모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과거 우리나라 식문화에서 쌀이 '주식'으로서 역할을 했고 벼농사 중심의 농업 발전이 이뤄졌기 때문. 벼농사 중심의 농기계 발전으로 논농사가 다른 밭농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것, 또 쌀밥이 우리에게 단순한 '주식'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내가 생산하고 남에게 빼앗기는' 경험을 했던 한국인에게 쌀밥을 먹는 것은 '설움을 삼키는' 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쌀 자급자족이 가능해졌던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다. 이전까지는 급격한 인구 증가와 농업 기술, 농자재 부족으로 특히 1960년대에는 쌀 소비 억제와 혼분식 장려 운동이 이뤄졌다.

"예전엔 쌀밥이 얼마나 귀했는지 몰라요. 우리 연배 정도 되는 사람들도 어릴 적엔 쌀밥 먹는 일이 흔치 않았고 국수나 죽, 보리밥을 주로 먹고 살았지. 칼국수도 그때 많이 먹어서 질린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아요. 1980년대 박정희 정부 때지. 통일벼 품종이 나오고, 비료나 퇴비도 많이 발전하면서 쌀 생산량이 충분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경제 발전과 다양한 먹을거리 수입으로 식문화가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요즘, 쌀과 우리나라 농산물, 농민들은 무대 밖으로 밀려난 듯한 모습이다. 기존 쌀생산 농업인의 고령화로 자연스럽게 그 규모도 줄어드는 상황.

"지금 우리 작목반에 있는 사람들도 거진 60~80대예요. 나도 앞으로 한 5년 정도 지나면 지금 규모로는 농사 못 지어요. 지금은 기계로 다른 사람 소유 논도 임작업 해주지만 조금 지나면 그럴 힘이 없지. 특히나 친환경 쌀농사는 연세 드신 분들이 하기 사실상 어려워요. 수작업으로 잡초 제거해야 하는데, 그걸 나이 드신 분들이 어떻게 하느냐고."

그럼에도 유근희 씨가 농사일을 계속하는 것은 이것이 그가 오래도록 해 온 일이고, 농업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농업이 천대받는 사회, 괜찮을까

머지않아 기후위기와 농가인구 고령화로 우리나라 농산물과 쌀 생산량은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쌀 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정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쌀 재배면적을 줄여왔는데, 지난 7월 쌀 부족으로 슈퍼마켓과 마트에 재고가 동나고, 사재기 등 현상이 이어지기도 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발간한 '2023년 양정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49.3%. 주요 곡물 중 쌀은 유일하게 자급자족이 이뤄진다[콩(7.7%), 밀(0.7%), 옥수수(0.8%)]. 그러나 쌀 농가의 상황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 앞으로의 상황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기후위기와 식량주권위기가 심화되는 오늘날 먹거리의 중요성은 점차 높아지지만, 유근희씨는 여전히 사회가 농업과 농업인을 천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지금 식량위기니 뭐니 그런 소리 해요. 그런데 농민이 지금 처해 있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같이 들려. 그런 게 정말 위기라면, 그런 위기가 온다는 걸 예측을 했다면 거기에 대비책을 세워서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우리는 죽도록 농사를 짓고 정부가 준다는 대로 받는 형편이니. 생산자 입장에서 식량위기 이야기 들으면 우리 현실하고 너무 동떨어져서, 다른 나라 얘기 같아요."

농업을 귀하게
 충북 옥천 청산면 장위리 유근희씨.
ⓒ 월간 옥이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공익직불제'과 '농민공익수당' 같은 제도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공익직불제은 2020년 5월 시행된 제도로 '농업 및 농촌의 공익기능을 증진하고 농업인 소득을 안정화하기 위해' 제정됐다. 매년 2~3월 직불금 신청·등록 기간을 거쳐 10월 지급금액을 산정해 11월에 지급하는데 연간 130만 원 정도가 주어진다. 농민공익수당은 정부 차원에서 제공하는 공익직불제와 달리 지자체에서 농민을 지원하는 것으로 지자체별로 차이가 있다. 충북의 경우 농가당 연 60만 원을 지급한다. 유근희 씨는 이러한 제도의 존재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올해 60만 원씩 농민공익수당이 들어왔어요. 농민 입장에서 열심히 농사짓고 수고한 것에 대한 위로금처럼 느껴지죠. 이거라도 없으면 이제 농촌에서 농사로 먹고살 사람은 없다고 봐요. 쌀값은 오르락내리락 안정되지 않고 불안하지, 주변에서는 흙구덩이 뒹구는 직업이라고 천대하지... 직불금이 큰돈은 안 돼도 '농사가 하늘이 준 내 직업'이라 생각하고 일하게끔 하는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그는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쌀농사가 계속되게 하려면 "농업을 귀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여러 정책이 기반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해. 정부 차원에서 농업 지원에 대해 체계적으로 만들어서 생산자는 생산만 열심히 하면 할 수 있게끔.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것. 그게 농민으로서 가장 바라는 점이죠."

월간옥이네 통권 89호(2024년 11월호)
글 사진 한수진

▶이 기사가 실린 월간 옥이네 정기구독하기 https://goo.gl/WXgTFK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