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식 상법 개정 땐, 소송 시달릴 것" 16곳 사장단 긴급성명
삼성·SK·현대차·LG·롯데를 비롯한 국내 주요 기업 16곳 사장단이 “현재와 같은 어려움이 지속할 경우 국내 경제는 헤어나기 힘든 늪에 빠질 수 있다”라며 “상법 개정 등 규제의 입법보다 경제 살리기를 위한 법안에 힘써 달라”는 내용의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박승희 삼성전자 사장, 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위원장, 이동우 롯데지주 부회장, 차동석 LG화학 사장, 김동욱 현대자동차 부사장 등 각 그룹을 대표한 사장단은 한국경제인협회와 함께 21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한국경제 재도약을 위한 주요 기업 사장단 긴급 성명’을 내고 이같이 밝혔다
늘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이들이 한데 모여 작심 성명까지 낸 데는 그만큼 기업들의 상황이 절박하다는 의미다. 특히,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에 대한 우려가 크다. 지난 19일 더불어민주당은 그간 재계가 반대했던 조항들을 담은 상법 개정안을 최종 확정해 발의했다. 현재 상법상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은 ‘회사’인데 야당의 개정안은 이를 ‘회사와 주주의 비례적 이익’으로 확대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대규모 상장사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등 논란의 조항들도 대거 포함됐다. 거대 야당이 당론으로 개정을 추진하고 있어 본회의 통과 가능성이 작지 않다.
기업들은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회사가 주주들의 소송에 대응하느라 진취적인 경영 활동을 하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사들이 주주 각각의 이익과 손실을 따져 결정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장 배당 확대나 이익 분배를 원하는 주주와 미래 투자 재원으로 이익을 유보하길 원하는 주주의 이익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이사회 결정에 손해를 입었다고 느낀 주주들의 소송이 일년 내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는 헤지펀드의 기업 경영권 공격 수단으로 악용될 부작용도 있다. 주식 1주당 뽑아야하는 이사 수만큼 투표권을 주는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헤지 펀드가 원하는 인물을 이사회에 앉히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단기 차익을 원하는 헤지 펀드의 ‘먹튀’ 공격에 더 쉽게 노출된다는 것이다. 행동주의 펀드의 한국 기업 공격은 2019년 8건에서 2023년 77건으로 4년 새 9배 늘었다. 이날 사장단은 “상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많은 기업이 소송과 해외투기자본 공격에 시달리고 신성장동력 발굴에도 상당한 애로를 겪을 것”이라며 “기업 경쟁력에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고 한국 증시의 밸류 다운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영계는 기업 지배구조를 규제하는 법안보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의 성장 동력을 살리기 위한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읍소하고 있다. 3분기말 한국의 가계부채는 1900조원을 돌파하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며 내수 침체가 장기화됐고, 그나마 버텨주던 수출은 주력 업종의 경쟁력이 약해지면서 경제성장률도 하락세에 있다. 이에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한국의 올해 성장률을 기존 전망보다 0.3%포인트 낮춘 2.2%로, 내년 성장률은 기존보다 0.2%포인트 하향 조정해 2%로 전망했다.
특히, 첨단기술 개발과 제조업 일자리 유치를 위해 선진국들이 세제 혜택·보조금 경쟁을 하며 기업들을 지원하는 상황이다. 내년 1월 더 강력한 보호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 한국 기업들의 경쟁 환경은 더 척박해질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상법 개정안은 기업들에는 경영 불확실성을 키우는 메가톤급 불씨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합부 교수는 “반도체의 경우 미국·일본 등은 전체 투자금의 40~50%를 직접 보조금으로 지원하며 생산 시설을 유치하는데 한국은 투자를 하면 세액의 15~25%를 돌려주는 정도”라며 “갈수록 치열해지는 기술·자본 전쟁에서 정부의 지원 없이 한국 기업들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경영계는 정부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과감한 규제개혁을 추진하고, 각국이 첨단산업 지원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만큼 인공지능(AI)·반도체·2차전지·모빌리티·바이오·에너지·산업용 소재 등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이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도록 지원해달라는 요구다. 이날 사장단은 ”경제계는 신사업 발굴과 일자리 창출에 노력하겠다”며 “신시장 개척과 기술혁신으로 수출 경쟁력을 제고하고, 중소기업 기술지원, 국내 수요 촉진 등 민생경제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적극 추진해 내수 활성화에 앞장서겠다”라고 말했다.
최현주ㆍ박해리 기자 chj8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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