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만에 속편 제작, 노 감독의 속내가 궁금하다
[고광일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잃고 로마에서 쫓겨난 고귀한 인물이 노예로 전락한다. 검투사가 된 주인공은 자신을 로마에서 내쫓고, 로마를 타락시킨 지도자에 맞서 복수를 꿈꾼다. 검투사로 승승장구하며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다. 마침내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어 복수에 성공하고 로마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는다. <글래디에이터> 1편과 2편의 스토리를 아주 거칠게 요약한 것이다. 스토리 요약이 어느 영화나 비슷하게 만드는 것처럼 <글래디에이터>도 스토리만 봐서는 1,2 편이 똑같은 영화라는 착각을 할 수 있다.
<글래디에이터> 1편과 2편은 로마의 전복을 꿈꾸지만 이야기의 주체가 다르다. 굳이 따지자면 1편 막시무스(러셀 크로)의 캐릭터는 루시우스(폴 메스칼)와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로 쪼개졌다. 로마의 위대한 장군은 아카시우스에게, 복수심에 불타는 검투사는 루시우스에게.
연전연승하며 로마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아카시우스는 황제의 권력을 위협한다. 계속된 전쟁으로 젊은이들을 사지에 내모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그런 그가 황제를 몰아내고 반란을 꿈꾸는 건 충분히 논리적인 전개다.
▲ 영화 <글래디에이어터2> 스틸컷 |
ⓒ 영화 <글래디에이어터2> 스틸컷 |
민주주의와 공화정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후반부의 전개는 더 갑작스럽다. 청년기부터 성인기까지 영향을 미쳤을 누미디아인으로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짧은 유년기를 보낸 로마인이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제였던 할아버지, 공주였던 어머니를 둔 황태자의 입장으로 돌아온다. 로마에 침략당해 매일 죽음 앞에 놓인 검투사들이 로마의 정신을 되찾자는 루시우스에게 지지를 보내는 것도 어색하다. 식민지 독립운동가 입장에서 제국을 해체하고 각국에 자유를 돌려주자는 주장이었다면 어땠을까.
1편에서 콤모두스가 막시무스의 칼에 생을 마감하고 홀로 남은 루실라는 아버지인 아우렐리우스의 유지를 잇고 원로원의 지지를 받아 로마를 공화정으로 되돌리는 데 힘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에 로마는 여전히 폭군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다. 정의로운 제다이 루크와 마지막에 정신을 차린 아나킨(=다스베이더)의 활약으로 시스 로드를 물리치고 우주의 평화를 되찾았지만 더 강해진 제국군 앞에서 동아리 수준의 공화국 잔당이 되어버린 <스타워즈> 7편을 봤을 때 어리둥절함을 <글래디에이터2>에서도 느끼게 됐다.
▲ 영화 <글래디에이어터2> 스틸컷 |
ⓒ 영화 <글래디에이어터2> 스틸컷 |
마크리누스는 루실라에게 '로마의 가치'가 무엇인지 묻는다. 로마라는 제국은 부모에게 버림받고 늑대의 젖을 먹으며 자란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자신의 입지전적인 전적이 그랬든 마크리누스는 죽고 죽이는 싸움 끝에 자유와 권력을 얻는 콜로세움이라야말로 로마의 정신이라고 항변한다. 뛰어난 언변으로 카라칼라를 꼬드겨 동생인 게타를 살해하도록 종용하는 일도 그저 로마 정신의 발현일 뿐이다.
선대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원수에 대한 가장 큰 복수는 그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루시우스 또한 그 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복수의 궤도를 이탈하기는 쉽지 않다. 로마 시민들은 타락한 황제 대신 새롭고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 자신에게는 승승장구하는 검투사로서의 인기, 알고 보니 루실라의 아들이자 황제의 손자라는 정통성. 그리고 무엇보다 루실라와 아카시우스에게 물려받은 5천 명의 정예 병사가 있다. 원수가 바라는 모든 힘을 쥔 그를 다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루실라와 루시우스가 공화정을 통해 되살리려는 민주주의의 가치는 로마에 살아있는가. 카라칼라가 게타를 죽이고 마크리누스를 제 2집정관에 임명하던 순간. 황제 앞에 모인 원로원의 멤버들은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새로운 집정관을 열렬히 추대했다. 심지어 제 1집정관은 카라칼라가 키우는 원숭이인 돈두스였는데도 말이다. 로마의 시민들은 어떤가. 폭군 콤모두스가 되살리고 카라칼라, 게타 황제가 지원하는 검투사 경기를 보기 위해 콜로세움에 모여들어 잔인한 살육을 여흥으로 즐기는 시민들에게 루시우스가 기대하는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을까.
▲ 영화 <글래디에이어터2> 스틸컷 영화 <글래디에이어터2> 스틸컷 |
ⓒ 영화 <글래디에이어터2> 스틸컷 |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에서 실시한 < 2024 유권자 민주주의 인식조사 >에서 54.7%가 '의회와 정당에 개의치 않는 강한 지도자가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로마를 다시 위대하게(Make Rome Great Again)'을 외치던 루시우스의 고민도 여기서 시작할 것이다. 그는 힘과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답을 구하지만 아버지는 역사에서 모든 흔적이 지워진 채 콜로세움의 지하에 유품으로만 존재하며, 관객이 떠난 텅 빈 콜로세움에는 어머니가 남긴 핏자국만 남아있다.
서사시와 정치극으로 한 번씩 변주된 <글래디에이터>시리즈. 리들리 스콧 감독은 기회가 된다면 3편을 제작하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다. 조금 있으면 구순(九旬)에 접어드는 노감독은 힘과 명예를 가진 로마를 그리고 싶은 걸까. 힘과 명예를 추구하는 로마의 실상을 고발하려는 걸까. 이쯤 되면 그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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