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즈 마케팅인가? 영화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김상목 기자]
▲ 영화 <미망> 스틸 이미지 |
ⓒ ㈜영화사 진진 |
올해 재개봉해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던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Before' 3부작에 감히 스스로 비견하는 독립영화 한 편이 개봉을 맞이한다. 온라인상에서 여럿이 '감히!'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이것도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인가? 하며 갸우뚱거리는 이들도 제법 나왔다. 무슨 배짱으로 전설이 되어가는 연작에 자신을 비기는 것일까 호기심을 이끄는 데는 꽤 성공적인 기획으로 보인다. 실상이 동떨어져 있다면 무슨 욕을 먹으려고 하는지 괜히 노파심이 생길 정도다. 궁금하면 확인해야지 도리가 없다. 그렇게 <미망>과 만났다.
▲ 영화 <미망> 스틸 이미지 |
ⓒ ㈜영화사 진진 |
쭈뼛하면서도 느리게 발동한 안부확인 내용을 들어보면 제법 가까웠던 사이로 보인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는 바람에 둘은 우산을 쓴 채 종로 일대를 걸으며 그들이 늘 주고받았을 패턴의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다 어느새 각자의 목적지로 갈라설 때가 됐다. 둘은 다시 본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가벼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총총걸음으로 갈 길을 간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시간대로 복귀한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여자는 과거에 남자와 우연히 재회한 그때처럼 극장에서 영화 해설을 진행하는 참이다. 일상적인 공기와는 조금 다른 느낌, 오늘이 한동안 여자가 단골로 맡아왔던 행사와 주최한 극장의 마지막 시간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극장의 피날레를 상징하듯, 그가 오늘 해설을 담당한 영화도 이제는 잊힌 서울 풍경이 담긴 고전 한국영화다. 행사를 마치고 극장 관계자들과 함께 종로 뒷골목에서 조촐한 쫑파티가 열린다. 살짝 취한 여자는 중간에 자리를 일어나 귀갓길에 오른다.
일행 중 누군가가 뭔가 할 말이 남은 것처럼 여자를 따라나선다. 옛 친구인 남자와 거닐던 광화문 일대를 이번엔 낯선 이와 함께 걸으며 둘은 선문답하듯 서로의 속마음을 탐험하기 시작한다. 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침을 꼴딱 삼키게 할 만큼 그냥 흘리는 대화는 아니다.
또 다시 시간이 제법 지났다. 남자와 여자는 다시 만난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한 것, 변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확인하듯 대화는 천천히 이어진다. 그 와중에 일행은 다시 광화문으로 원점 회귀하듯 돌아온다. 그들이 몇 해 전 함께 거닐던 광화문도, 자신들도 예전과 같지만은 않다. 그런 단절과 연속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 영화 <미망> 스틸 이미지 |
ⓒ ㈜영화사 진진 |
독립된 단편들의 조합이지만 온전히 개별적인 작업을 이어붙인 것과 달리 연작의 통합력 아래 의도된 결과물임이 분명하다. 세계관과 캐릭터의 동질감은 물론 하나의 연대기로 처음부터 계획된 작업이라 옴니버스 장편이 필연적으로 갖는 단품 사이의 이질감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치 과거 아트록 명반들이 지향하던 (개별 곡이 아니라 전체를 소화할 때 온전해지는) 콘셉트 앨범과 통하는 면모다.
'누가 제목을 함부로 짓는가!' 감독의 단호한 일갈이 환청처럼 들린다. 제목은 영화 속에서 3부 구성에 맞춰 독자적 의미가 부여된다. 친절하게 단막극 나누듯 각 부의 소제목이 관객에게 지침서처럼 안내된다. 최초로 작업한 <달팽이>가 활용된 1부의 '미망'은 다음과 같다.
迷妄 (미혹할 미, 망령될 망)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
여자는 남자와 광화문 거리에서 정말 우연히 만난다. 대개 과거 사연을 품고 재회한 설정이 뒤따르니 미련 혹은 회한과 함께 혹시 모를 가능성을 탐구하는 여정이 늘어지게 나올 법하지만, 손가락 틈새로 새어버린 모래는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시간은 정방향으로 흘러갈 뿐 역행은 불가능하다. 아직 인류는 타임머신을 발명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말이다. 뜻밖의 재회에서 관객이 기대할 판타지는 결코 제공되지 않는다.
<서울극장>이 담당하는 2부의 '미망'은 1부에서 한발 더 전진한다.
彌望 (두루 미, 바랄 망)
멀리 넓게 바라보다
여자는 마치 1부에서 남자와 금방 헤어진 것처럼 그가 광화문을 찾게 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다. 그 일상성은 곧 붕괴할 운명이다. 유서 깊은 극장은 마치 <시네마천국>이 아련하게 보여준 것처럼 이제 곧 사라질 것이다. 현실의 종로3가 서울극장이 처한 운명을 스크린 속에서 고스란히 추모하는 행위다. 여자가 해설하던 한국 최초 여성 감독 박남옥의 <미망인>이란 점 또한 상징성이 두드러진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필름이 소실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행히 시나리오로 유추할 따름이다. 그런 모호한 가능성은 2부에서 여자가 만나는 새로운,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의 남자가 입버릇처럼 툭툭 던지는 '그럴 수 있지'와 결합해 영화 속 영화의 열린 결말과 화면 속 현실의 상황을 고리처럼 일순간 연결하고 만다.
1부는 20분, 2부는 30분 분량이다. 여기에 새로 추가된 3부는 40분, 마치 점점 영화 속 소우주가 확장을 거듭하는 모양새다. 나선으로 순환하듯 천천히 넓어지는 우주의 본질처럼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후반부의 '미망'은 아래의 의미다.
未忘 (아닐 미, 잊을 망)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언제까지고 도전과 실험을 자신들의 의지만 있다면 해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주변 환경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물리법칙 안에서 지속될 수 없다. 인물들은 그 준엄한 법칙을 깨닫게 된다. 뜻하지 않은 이별의 순간을 공동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한때 죽고 못 살던 인연이지만 문득 돌아보니 소식이 끊기고 연락조차 할 길 없는 관계가 적지 않다. 그런 지나친 관계들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는 경조사인 경우가 태반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 역시 바깥세상의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 영화 <미망> 스틸 이미지 |
ⓒ ㈜영화사 진진 |
한국 사회 온갖 욕망과 번뇌가 소용돌이치지만, 그 속에 천만 개인이 일상을 영위하는 평범한 삶의 장소이기도 한 서울, 그 대도시의 기원이자 근본은 군주가 기거하던 궁성과 관청이 있던 광화문-종로 일대다. 왜 영화 속 인물들이 행성이 공전하듯 광화문 일대를 방랑하는지 답이 제시되는 순간이다. 수천만의 삶과 죽음이 이어져 온 도시 역사가 응축된 시공간에서 현재를 사는 인물들이 질긴 인연으로 얽힌다. 미련을 품은 이들에게 점잖게 포기할 건 포기하고 미래를 향하라고, 하지만 과거의 축적된 기억을 놓치지는 말라는 주문이 중력처럼 그들을 휘감는다.
그런 은근한 운명론의 작업 가운데 이어져 온 역사 및 당대의 사회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정교한 설계가 조석간만의 작용처럼 그려지는 대목이 양념처럼 맛을 더한다. 정권의 명분을 위해 밀어붙인 이순신 동상에 얽힌 미스터리, 민중의 지혜가 담긴 피맛골 유래와 현주소, 과거 흔적을 갈아엎는 구도심 재개발에 대한 은근한 발언이 수다 속에서 툭툭 흘러나온다. 관객 각자의 기호와 지향에 따라 골라서 먹을 수 있는 장치다.
결국 최초의 의문, 링클레이터의 3부작과 <미망>을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 있는가로 돌아가 보자. 비슷한 점과 차이점이 확연히 나뉜다. 에단 호크 vs. 하성국, 줄리 델피 vs. 이명하 배우의 연기 조합과 변화지점 포착은 주목할 수밖에 없는 핵심 관람 포인트다. 그들 사이에 대칭을 형성하면 관객 각자의 결론이 어렵지 않게 나올 법하다. 빈/파리/에게해의 섬으로 주인공의 나이 먹음을 각인하는 기획 대 광화문이라는 구도심의 역사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기획의 대비도 주목해야 한다.
▲ 영화 <미망> 포스터 이미지 |
ⓒ ㈜영화사 진진 |
미망
Mimang
2024|한국|광화문 로맨스
2024.11.20. 개봉|92분|12세 관람가
감독 김태양
주연 이명하, 하성국
출언 박봉준, 백승진, 정수지, 김서휘
투자·제작 제이콥 홀딩스
제작 영화사 은하수
투자·배급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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