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에서 '아싸'로 사는 법을 배우다

정호갑 2024. 11. 1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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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이네 시골살이 30] 깨닫는 기쁨과 세상과 거리 두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정호갑 기자]

수도산 자락의 가을 풍광을 자랑하니 지인들이 자주 찾아온다. 찾아온 지인 가운데 혹시 호(號)가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호는 무슨 호'라고 답했지만, 시골살이를 하면서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한 바는 있었다. 그것에 맞춰 '호 하나 지어볼까'라며 생각한 적도 있었다.

시골살이를 선택한 것은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과 세상에 가까이 다가서다 보면 부딪힘이 있을 수밖에 없다. 부딪히면 잘잘못을 떠나 내 밑바닥이 드러나는 것 같아 싫었다. 설사 이겼더라도 남아 있는 상처를 치유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내 삶을 살고 싶었다.

또 하나, 자연과 함께하면서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배우고 깨닫고 싶었다. 이제 명예나, 지위 그리고 금전에 그렇게 얽매일 나이는 지났다. 산행을 하면서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올 때 만나는 오르막은 결코 오르막이 아니다.

그 오르막은 짧을 뿐만 아니라 올라온 만큼 급한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다. 삶의 내리막에서 탐욕을 부리다 보면 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제 마무리를 잘해야 할 나이이다. 이제 실수하면 만회할 시간도 없다. 자연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몸으로 깨달으며 그것을 삶으로 이어가고 싶었다.

이에 어울리는 말이 없을까? 순간 '아싸'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연과 함께하다 보면 순간순간 깨달을 때가 있다. 그때 '아싸'라고 홀로 속삭이며 기쁨을 맛본다. '아싸'는 뜻밖에 기쁜 일이 생겼거나 원하는 일을 이루었을 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다. 그런 기쁨을 자연과 함께하면서 깨닫고 맛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 사이에서, 세상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한 능력과 지혜가 매우 부족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삶이 값어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거리를 두고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중심을 잡으려 했다.

거리를 두어야만 사람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아싸'는 아웃사이드(outsider)를 빠르게 발음하면서 다소 변형한 형태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무리에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내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쓰이고 있다. '아싸'는 깨달은 기쁨을 나타내는 동시에 세상과 거리 두기를 뜻하는 말로 쓰일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을 담을 수 있기에 '아싸'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퇴임한 후 이곳에 터를 잡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수도산이다. 수도산에는 산과 계곡, 치유의 숲 그리고 역사가 숨 쉬고 있다. 산골 오지에 있기에 세상과 거리 두기를 둘 수 있으며, 자연을 배우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도암에서 바라본 수도산 단풍
ⓒ 정호갑
가을 하면 단풍이다. 자연스레 수도산 계곡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수도산에 펼쳐진 단풍을 보고 있으면 굳이 단풍 절경으로 이름난 곳을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일어나질 않는다.

단풍의 다양한 색을 보며 색의 조화에 대해 생각한다.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그저 그 자리에 자기 색으로 피어나면 되는 것이다. 그 어울림이 예쁘다. 어울림은 조금 눈에 거슬릴 수 있는 개성이라는 가시를 그대로 인정하여 주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다.

단풍을 보면서 깨닫는 것 또 하나. 거리 두기이다. 단풍이 아름답다고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면 생각보다 흠이 많이 보인다. 벌레 먹은 단풍잎, 잎의 끝이 햇빛에 거슬린 단풍잎, 이미 말리 버린 단풍잎 등등. 정말 잎 그대로 곱게 물든 단풍잎을 찾아보기 어렵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안 된다. 단풍은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만 예쁘다.

사람에게 흠은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이다. 그 사람의 삶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것이다. 굳이 그 사람의 흠을 찾아 다시 그 아픔을 건드려야만 할까? 거리를 두면 그 흠은 보이질 않는다. 거리를 두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나?
 무흘구곡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
ⓒ 정호갑
수도산에서 흐르는 계곡인 무흘구곡의 풍광은 정말 아름답다. 무흘구곡의 길이는 30km 넘는다고 한다. 흐르는 물은 보며 쉬지 않고, 파인 곳을 메우며, 다투지 않고 잘도 흘러간다. 가을 계곡물은 많지도 적지도 않아 흐르는 물소리가 귀를 맑게 한다. 꽤 오랫동안 계곡을 바라보며 물소리를 들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노자의 도덕경 8장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잘하면서 다투지 않으며,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자리 잡는다. 그래서 도에 가깝다. 머물 때는 땅처럼 낮은 곳에 잘 머물고, 마음 쓸 때는 그윽이 깊이 마음을 잘 쓰며, 함께 할 때는 어질게 행하기를 잘하고, 말할 때는 믿음직스러운 말을 잘하고, 바로 잡을 때는 다스리기를 잘하고, 일할 때는 능숙함을 펼치기를 잘하고, 움직일 때는 때를 맞추기를 잘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않으니 이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세상살이에 어두운 내가 어떻게 감히 물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흐르는 물을 보고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면 내 삶에 티끌만 한 변화라도 있지 않을까. 나를 낮추고, 이익을 놓고 다투지 않기 위해 애쓰려 한다.
 수도암에서 일출을 기다리며
ⓒ 정호갑
수도산에는 수도암이 있다. 암자라고 하지만 웬만한 절의 크기이다. 보물이 3점이나 있다. 수도암에서 바라보는 가야산 연화봉의 풍광은 일품이다. 특히, 연화봉 위로 떠오르는 일출은 장관이라 한다. 이 장관을 보기 위해 수도암을 찾았지만, 날짜가 어긋나 아직 연화봉 위로 떠오르는 일출은 보지 못했다.
일출의 아름다움은 멋있지만, 일몰도 그 못지않게 아름답다. 특히 비 갠 뒤, 마당에서 보는 일몰은 정말 아름답다. 이제 일몰의 아름다움을 준비할 시간이 되었다. 탐욕을 버리고 몸을 낮추며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당에서 바라본 일몰
ⓒ 정호갑
정원에는 국화가 가을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가을이 짙어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니 정원의 꽃들이 제 갈 길을 간다. 추위에 맞서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이 추위와 정면으로 맞서는 꽃이 있다. 바로 오상고절의 국화이다. 정원에는 많은 국화가 있다. 소국, 감국, 산국, 구절초, 벌개미취 등이 있다. 색도 다양하다. 노란색, 흰색, 빨간색 등이 있다. 이 모두 한결같이 서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색과 향기를 피워낸다.
 정원에 핀 국화
ⓒ 정호갑
 정원에 핀 국화
ⓒ 정호갑
지난날 먹고 사는 것이 두려워, 옳고 그름에서 살짝 비켜나간 때가 있었다. 그때 위축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나라는 존재가 싫었다. 신영복 선생의 호가 탐난다. '쇠긔', 우이독경(牛耳讀經)에서 따온 말이 아닐까?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내 방식대로 살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먹고 사는 일에 벗어나, 산골 사람이 되었으니 나도 내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래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다.
인현왕후가 폐비 되고 머물렀던 청암사도 있고 인현왕후 길도 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인현왕후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이후의 삶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300여 년이 지난 그 길을 걸으며 나도 지난 내 삶을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그려본다.
 국립김천치유의 숲 자작나무
ⓒ 정호갑
수도암 가까이는 국립김천치유의 숲이 자리하고 있다. 치유의 숲을 거닐다 보면 자작나무 숲을 마주하게 된다. 자작나무 숲을 보면 마음이 맑아진다. 그리고 숲에서 나오는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어 마신다. 맑아진 마음과 몸이 시골살이에 힘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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