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련의 시선] 너무 조용한 한국

박수련 2024. 11. 19.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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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련 산업부장

돈이 더 큰 돈을 벌듯, 요즘은 엔비디아의 GPU(그래픽처리장치)가 레버리지 수단이 되고 있다. 지난 4일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블랙스톤·핌코·칼라일·블랙록 등 금융 회사들이 엔비디아 GPU를 담보로 잡고 ‘네오클라우드’ 업체들에게 총 110억 달러(15조4000억원)를 대출해줬다고 한다.

네오클라우드는 AI 개발 기업이나 데이터센터 운영 회사들에게 GPU를 클라우드로 빌려주는 스타트업인데, 이들이 더 많은 GPU를 구입하기 위해 갖고 있던 GPU를 담보로 빚을 낸 것이다. 신규 GPU 모델 등장에 따라 혹은 시장 공급에 따라 GPU의 자산 가치는 유동적인데도, 이게 GPU 시장을 더 키우는 돈줄이 됐다.

「 돈, 인재, 기술 블랙홀 엔비디아
AI 인프라 리셋, 일본과 손정의
야심 잃은 삼성, 방향 놓친 한국

혁신 기술과 금융의 신선한 결합으로 봐야할지, 엔비디아 장기 독주를 내다본 월가의 위험한 베팅일지 판단하긴 아직 이르다. 하나 확실한 건 이 신종 담보대출 시장의 수혜자가 엔비디아란 점이다. GPU의 공급과 수요를 모두 엔비디아가 쥐락펴락 하는 ‘GPU 이코노미’는 이렇게 커지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요즘 인도, 유럽, 일본 등 전 세계를 돌며 이런 사업 모델을 각국에 확산하는 데 열심이다. 18~19세기 증기기관과 전기 등 신종 에너지 자원으로 산업화에 먼저 성공한 국가들이 이후 세계의 운명을 좌우했듯, GPU로 무장한 데이터센터들이 이번에도 그런 차이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면서다. 그가 파는 건 GPU가 아니라 비전이다. 전 세계의 인재와 자본이 엔비디아로 빨려들어갈 만도 하다.

지난 14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엔비디아 AI 서밋 재팬’도 그런 설득의 무대였다. 이날 엔비디아 젠슨황 CEO와 소프트뱅크그룹 손정의 회장은 일본에서 세계 최초로 ‘AI 그리드’를 함께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언제 어디서나 AI에 접근할 수 있는 AI 접속망을 일본 전역에 깔겠다는 계획이다. 엔비디아가 차세대 GPU를 일본에 먼저 공급하겠다는 약속이자, 소프트뱅크가 그걸 대량 구매하기로 계약했다는 의미다.

왜 일본일까. AI만큼은 놓칠 수 없다는 일본의 절박함이 젠슨 황의 야심과 맞아 떨어졌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력으로 산업화에 성공했으며 100년 전엔 제국이 되려고도 했지만, 최근 30년 간 일본은 세계의 혁신 경쟁에서 철저히 소외됐다. 그런 일본이 지난 2~3년간 빠르게 달리고 있다. 대만 TSMC와의 합작해 반도체 제조 기지를 되살리고 있고 오픈AI 아시아 지사도 도쿄에 유치했다. 이번 황 CEO 방일에 맞춰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2030년까지 10조 엔(91조원) 이상을 AI와 반도체 산업에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엔비디아가 일본 산업의 부활에 기여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사업 레퍼런스가 또 있을까.

무엇보다 일본엔 AI 파도에 올라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기업인이 있다. 손 회장이다. 그 역시 일본만큼이나 절박하다. 2017년 100조원짜리 투자펀드(비전펀드)를 만들고 ‘AI 혁명’을 수없이 말했으면서도 ‘정작 오픈AI엔 투자도 못했다’는 비아냥을 받았던 그가 황 CEO에게 여러차례 “리셋”을 외칠 수 있었던 건 AI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열망이 있어서다.

나라 밖에선 이런 움직임이 숨가쁘게 일어나고 있는데, 한국은 참 조용하다. AI 인프라 시장을 엔비디아가 다 먹겠다며 전 세계를 상대로 꿈을 파는 젠슨 황 같은 기술 경영자도, “도박꾼”(라이오넬 바버 전 FT편집국장)이란 평가를 받을지언정 혁신기술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손정의 같은 투자자도 안 보인다. 기업가 정신은 희미해졌는데, 재계는 상속세 인하나 상법 개정안 반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걱정스럽다. AI 인프라의 핵심인 데이터센터나 반도체클러스터를 위해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 설득에 헌신적으로 나섰다는 지자체나 공무원 얘기도 못 들었다. 수도권 전기의 24%를 쓸 용인반도체클러스터가 표류할 거라는 우려가 나오고, 빅테크 기업들은 한국 아닌 일본·싱가포르·대만에 데이터센터를 짓는다.

대한민국 대표기업 삼성은 어떤가. 10조원 자사주 매입에도 ‘삼성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시중의 평가는 그대로다. 투자자들이 삼성에 기대하는 건 재무제표상의 잘 다듬어진 숫자가 아니라 ‘5년 후, 10년 후 삼성’이 기대되게 만드는 과감한 투자와 비전이다. 삼성이 각종 운영 비용을 아끼며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소식에서 삼성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긴 어렵다. 지난 수년간의 침묵과 안주가 현재 침체의 원인이라면 지금의 침묵은 또다른 위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세계의 돈, 인재, 기술 지도가 재편되고 있는 지금 삼성의 야망이 다시 살아나길 기대한다.

박수련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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