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종이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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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무역흑자를 거둬들이며 일본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던 1980년대 중반이었다.
일본 상품들은 미국 시장을 휩쓸었고, 일본 자본은 미국 기업과 부동산을 무섭게 사들였다.
미국을 향해 날릴 '종이비행기'.
한국 기업들은 미국에 공장을 짓고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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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무역흑자를 거둬들이며 일본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던 1980년대 중반이었다. 일본 상품들은 미국 시장을 휩쓸었고, 일본 자본은 미국 기업과 부동산을 무섭게 사들였다. 저무는 태양 같았던 미국은 노을처럼 회계장부를 붉게 물들인 무역·재정 수지 적자와 경기 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팎 위기에 고전하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무역장벽 설정’과 ‘달러 가치의 인위적 절하’라는 두 가지 출구에 주목했다. 관건은 ‘우아하게 상대를 압박할 것인가, 우악스럽게 손목을 비틀 건가’였다.
당시 미국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였던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는 여러 건의 대외 협상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일본과 마주 앉는 것이었다. 협상 테이블 분위기가 여느 때처럼 험악했던 어느 날이었다. 라이트하이저는 일본 측 협상단에서 건넨 종이를 쓱쓱 접기 시작했다. 그는 종이비행기로 변한 협상안을 일본 측 협상단을 향해 날렸다. 가뜩이나 굳었던 협상 테이블은 꽁꽁 얼어붙었다고 한다. 종이비행기 때문인지, 욕설도 마다하지 않는 거친 언행 때문인지, ‘징벌적 관세’를 사랑한다는 협박 때문인지 일본은 물러섰다. ‘관세 위협’이라는 무기를 휘두른 레이건 행정부는 1985년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으로부터 플라자 합의를 끌어냈다. 자국 통화가치 절상(달러화 가치 절하)은 각국의 자발적인 대미 수출 제한도 동반했다. ‘관세 협박’ ‘약한 달러’ ‘손목 비틀기’ ‘보호무역’…. 어딘가 낯이 익은 단어들이지 않은가.
국제통상 변호사로 30년가량 일하며 잊혔던 라이트하이저는 2017년 USTR 대표로 ‘협상장’에 복귀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그리고 자신이 설계한 ‘보호무역 정책’과 함께. 그는 국가안보를 이유로 수입산 철강 대부분에 최대 25% 관세를 매겼다. 대중국 무역제재(중국산 수입품에 관세 부과)를 관철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을 끌어냈었다.
트럼프의 퇴장으로 라이트하이저와 보호무역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귀환했고, 더 강한 보호무역을 불러들일 예정이다. 라이트하이저는 지난해 6월 ‘노 트레이드 이즈 프리’(No Trade is Free, 한국 출간명은 ‘자유무역이라는 환상’)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트럼프 대선 캠프의 필독서로 불렸다. 트럼프가 선거 유세에서 언급한 보편 관세,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 등의 공약은 모두 라이트하이저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스스로 ‘관세 맨(Tariff Man)’이라 부르는 트럼프의 집권 2기가 시작되면 보호무역 정책의 최전선에 라이트하이저가 자리할 가능성이 크다. 그가 주목하는 건 미국의 막대한 무역적자다. 자유무역이 미국의 만성적 무역적자를 유발했고, 수조 달러의 국부를 해외로 유출시켰으며, 일자리 수백만개가 사라져 중산층이 무너졌다고 본다. 라이트하이저는 자유무역을 ‘약탈적 산업 정책’이라고 헐뜯으면서 미국을 구할 ‘관세 장벽’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세 장벽은 국제 무역을 무너뜨리고, 세계적 경제난을 촉발할 수 있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엔 인고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앞에는 버티느냐, 거래하느냐, 순응하느냐 같은 선택지가 놓이게 될 것이다. 테이블엔 무역부터 안보, 한·중 관계 등 온갖 청구서가 올라올 테다. 마냥 수비만 하기보다는 치밀하게 계산하고 상대방을 놀라게 할 ‘협상(압박) 카드’ 하나쯤 품고 있어야 한다. 미국을 향해 날릴 ‘종이비행기’. 마침, 미국에 투자하는 국가 중 한국이 1위다. 한국 기업들은 미국에 공장을 짓고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그래야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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