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사람보다 오래 잊히지 않는 존재

2024. 11. 19.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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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리 화가

요즘 나는 삼십 년 전 뉴욕 체류 시절 가까웠던 옛 미국 친구와 인스타그램에서 다시 만나 가끔 통화를 한다. 잊어가는 영어 공부도 할 겸 통화를 기다리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나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가자 지구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희생자의 70퍼센트가 여성과 미성년자들이라며 분노한다. 나는 북한의 청소년들이 남한 드라마를 보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기도 한다는 말을 격분하며 들려준다. 나이 들어가며 우정이란 참 좋은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보지 못했어도 끊어진 바로 그 지점으로 이어지는 기억의 탄력성에 감탄하며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이들의 공통점인 불안에 관해, 뉴욕과 서울의 가을 색에 관해 이야기한다. 한국에서는 쇼펜하우어가 인기인데 뉴욕은 어떤지 물으니 뉴욕 사람들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한다. 어디인들 제대로 읽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 누구나 고통 속 작은 행복 있어
새로운 시작이 윤회 끝내는 길
전쟁없는 세상 후세에 남겨야

그림=황주리

그 친구와 영어로 쇼펜하우어와 니체와 스피노자 이야기를 나눈 날 나는 꿈을 꿨다. 아마 제대로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인지, 나는 삼십 년 전 다녔던 뉴욕대학의 건물 안에 무거운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가방을 건물 구석에 세워두고 여기저기 물어가며 그 큰 건물의 복잡한 미로를 몇 번이나 빙빙 돌며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나오니 분명 조금 전의 건물의 내부와 다른 모습이었다. 내 가방이 어디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가방 안에는 노트북과 여권이 들어있었다. 건물 복도는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가방은 찾을 수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잠이 깼다. 며칠 뒤 그 친구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니 그 가방이 바로 내가 찾던 행복이라고 말해주었다. 말하자면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물건인 셈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그에게 나는 며칠 전에 본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을 추천해 주었다. 주인을 세 번 바꿔 만나게 되는 개의 일생을 그려낸 영화 속에서 주인공 견공은 개의 행복과 사람의 행복은 다르다고 말한다. 인간은 늘 새로운 걸 원하지만 우리 개들은 늘 한결같은 변치 않는 순간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고. 여건이 주어진다면 사람 역시 같으리라 믿는다. 한결같은 사랑, 우정, 가끔 삐꺽거릴지라도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얼마나 즐거운 길인가? 불교 용어로는 이생에서 윤회를 끝내는 가장 높은 경지의 인간을 아라한이라 한다. 누구에게나 다른 종류로 고통스러운 삶, 그 사이사이 소슬바람 같은 작은 행복들이 있다.

개들의 삶의 윤회는 주인이 바뀌는 삶이다. 문득 동생 대신 5년 동안 기르던 불도그 베티의 기억을 소환한다. 그동안 나는 베티의 초상을 사십 점 넘게 그렸다. 개를 길러 본, 아니 깊은 사랑과 우정을 나누어 본 사람은 안다. 사람보다 더 오래 잊히지 않는 존재가 개라는걸. 하지만 그들도 고독과 불안에 시달리며 자주 먼 산을 바라본다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는 세상의 나쁜 사람들이여. 모두 다 개만 같아라. 개들은 다 천사라는 생각을 하면서, 엉뚱하게도 중학교 시절 읽었던 소설 ‘백치 아다다’를 떠올린다. 두 번째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오자, 전 남편이 돈을 벌게 되면서 도박과 바람피우는 일에 빠져 자신을 버린 불행한 기억을 떠올리며 남편이 애써 번 돈을 다 갖다 강물에 흘려보내는 지적 장애인 아다다, 그 얼굴이 내 착한 개의 기억에 오버랩된다. 오랜 시간 혼자 외로워도 방석을 짓이겨놓는 일이 전부인,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온통 사랑만 주고 간 그 존재를 문득문득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건 소홀했던 미안함,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던 죄책감 때문이다.

그런 슬픈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때늦은 가을이다. 올가을처럼 천천히 늙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어머니께 좋아하시는 향수를 선물하려고 나는 가끔 백화점에 들른다. 잘생긴 청년들이 새로 나온 향수를 묻힌 종이 스틱을 나누어준다. 요즘 언제부턴가 그걸 내게는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못 봤나 보다 했는데 두 번째 그런 일이 있을 때는 기분이 좀 나빠졌다. 젊은 여성들에게만 나누어주는가 보다. 어쩌면 그 시간 향수를 살 확률이 제일 큰사람이 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도 그런 일을 하지는 않는지 돌이켜 본다. 내가 즐겨 법문을 듣는 스님이 말씀하시길 이승에서 윤회를 끝내는 일은 매 순간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일을 끝내고 새로 시작하는 거다. 백화점에 떠도는 공짜 향기를 맡으며, 언젠가 엘리베이터에서 은은히 풍겨오던 먼저 탄 사람의 향기를 떠올린다. 어쩌면 인류야말로 이제는 전쟁 없는 세상, 그런 향기로운 삶의 자취를 후세에 남겨줘야 옳지 않은가?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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