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아니더라도 회사가 해야할 일은 있다

이양지 2024. 11. 1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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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익 등 우려하며 신고 포기하는 이들... 조직문화, 구조 바꾸려 노력해야

[이양지]

몇 년째 직장 내 괴롭힘 예방 및 대응 강의를 하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 법제화가 노동자 인격권에 대한 인식 향상과 폭언·폭행 등 갑질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비판,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친 노동시민단체들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한다.

5인 미만 사업장, 특수고용노동자, 원하청 근로자 사이의 괴롭힘, 고객 괴롭힘 등의 사각지대가 있긴 하지만, 형법상 범죄에 해당하지 않는 괴롭힘까지 직장 내 괴롭힘으로 명확하게 명명하고, 공적 의제화를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 가해행위에 대해서 국가의 형벌권으로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장 내 자율적 규제에 맡기는 방식으로 법제화된 만큼, 개인에 대한 징계만으로 귀결되지 않고 조직 문화를 개선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긍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직장 내 괴롭힘 예방 교육에 힘이 빠지는 이유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직장 내 괴롭힘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는지 물어보면 많은 분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신고했는지 물어보면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잠시 기다리면 "신고했다가는 회사 다니기 힘들지", "신고해봤자 제대로 조사하지 않을 것이 뻔한데" 등의 속내를 꺼내 놓는다. 회사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할 것이라는 믿음이 전혀 없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곤란해질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 상담은 점점 늘고 있는데, 상담 사례들을 보면 노동자들이 왜 직장 내 괴롭힘 신고제도에 대해 불신을 갖는지 이해하게 된다. 폭언, 욕설이나 공개적인 장소에 서 무시하는 발언 등은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

가능하면 녹음으로 증거를 확보하고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일관되고 신빙성 있는 진술을 할 수 있도록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목격자도 기록하고, 당시 상황에 대해 주변에 보낸 문자, 일기, 정신과 진료나 심리상담을 받은 내역 등을 제출하라고 상담하지만, 신고 후 겪게 될 상황들에 대한 두려움과 상사에 대해서 불리한 진술을 해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신고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내괴롭힘은 개인간 갈등 문제가 아니라 조직문화의 문제로 봐야 한다.
ⓒ miricanvas
상사가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없는 업무만 시키거나 원래 업무가 아닌 업무를 지시하고 업무성과를 지속적으로 문제 삼거나, 과거의 가벼운 실수들을 들춰내고 모아서 반복적으로 징계를 언급하는 경우도 흔하다.

보통 상사 개인의 독단적 행위가 아니라 회사의 해고 회피 방안으로 행해지는 퇴사 종용인 경우가 많다. 내담자들도 그걸 알아서 직장내 괴롭힘 신고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권고사직 위로금이라도 협상해보고 원하는 조건이 아니면 차라리 해고를 당하고,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씀도 드려보지만, 이미 너무 지친 내담자들은 "실업급여만 받게 해주면" 권고사직을 받아들이고 만다.

최근 만난 세 건은 이미 사내에 신고를 한 뒤 상담을 신청하신 경우였다. 세 건 모두, 신고 후 '지체 없이'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으며, 신고 후 두 달이 지나서야 조사를 시작한 경우도 있었다. 내담자들은 회사로부터 조사 절차 및 처리 기간에 대한 안내를 전혀 받지 못했다. 구체적인 조사 절차 및 처리 기간은 회사의 내부 규정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회사의 인사규정 등을 확인해 보시라고 하자, 다시 연락이 와서 세부적인 규정이 없다고 했다.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시 조치에 관한 사항'은 취업규칙의 필수적 기재사항이지만,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일반적인 내용만 들어가면 법 위반이 아니기에 구체적인 절차 및 조사 기간에 대해 규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회사로부터 아무런 정보를 듣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담자들 모두 '회사가 나를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커져갔고, 그저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퇴사를 하면 조사가 끝나는 것이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신고접수 후 조사 개시까지의 기한, 조사 기한, 조사 보고서 완료 후 직장 내 괴롭힘 판정 절차 및 결과 통보 기한, 이러한 기한들의 연장가능 여부 및 연장 조건 등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마련하고 노동자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 건 모두 결국은 회사에서 외부 전문가를 선임해 조사했는데, 직장 내 괴롭힘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통지받고 종결되었다. 회사에서는 아무런 후속 조치를 하지 않았다. 사업주는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된 경우' 행위자에 대하여 징계 등 필요한 조치를 할 의무가 있을 뿐,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되지 않은 경우'에는 아무런 조치를 할 의무가 없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했지만 몇 개월간 불안한 시간을 보냈을 뿐 내담자들의 노동환경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되었다.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위축되어 업무관련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조사 완료 후 직장 내 괴롭힘의 판단기준에 명확히 부합하지 않거나 증거가 부족하여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되지 않은 경우에도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회사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당사자 간 화해와 원할한 업무 진행을 위한 중재의 자리를 마련하거나, 익명의 실태조사를 진행해서 개선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직장은 가치관, 성격, 경험 등 여러 가지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협업을 해야 하는 곳이다. 갈등 상황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갈등 상황에서 '괴롭힘'이 발생하는 것은 괴롭히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취약한 사람에 대한 괴롭힘 행위를 허용, 묵인하는 조직 구조와 조직문화의 문제이다.

이런 조직구조와 조직문화에는 성별과 젠더 문제도 있다. 한국노총이 2023년 실시한 직장내 괴롭힘 실태 결과, 괴롭힘 경험률은 남성(48.8%)보다 여성(68.9%)이 더 높았다. 신체적 폭력 및 위협 경험률도 남성 14.1%, 여성 21.8%였다. 대신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한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우울증 유병률이 여성 근로자는 3.24배, 남성 근로자는 5.23배 높다고 보고한 연구도 있다.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개인에 대한 징계가 아니라 투명한 규정과 실태조사를 통한 조직의 변화가 필요하다. 거기에는 성평등한 일터로의 변화도 포함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11월호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쓴 이양지 님은 노무사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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