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다시 살아난 ‘닉슨 쇼크’의 악몽
불황 촉발한 닉슨 패착 답습할까 우려
“한국은행은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만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로부터는 그렇지 않다.” 2020년대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의 ‘3고 불황기’를 설명하는 말로 남을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2년 전 발언이 지금도 유효하다면 내년부터 한국의 통화정책 방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럽과 일본을 포함한 주요국 중앙은행들도 연준으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한 처지는 다르지 않다.
트럼프가 내년 1월 20일 출범하는 집권 2기 행정부에서 포괄적 관세 같은 ‘미국 우선주의’ 정책들을 시행하면 고물가와 강달러가 세계를 덮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관세 장벽 못지않게 걱정되는 것은 연준에 대한 장악 시도다. 트럼프는 이미 연준의 통화정책에 개입하겠다고 공언했다.
트럼프는 미국 대선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8월 8일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개인 별장인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부동산 투자 성공담을 늘어놓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많은 돈을 벌었고 성공했다. 많은 사례에서 볼 때 내가 연준 구성원들이나 의장보다 더 좋은 직감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진짜로 하고 싶은 말도 빼놓지 않았다. “대통령은 그곳(연준)에서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금융가는 트럼프의 발언에서 반세기 전 ‘닉슨 쇼크’를 떠올렸다. 1970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은 백악관 고문이던 아서 번스를 연준 의장에 임명하고 이듬해부터 통화정책 완화를 압박했다. 그렇게 대통령의 입맛대로 저금리를 유지한 연준은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를 동반한 물가상승)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말았다. 닉슨 쇼크는 행정부 수장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해 장기 불황을 촉발한 패착으로 지금까지 거론된다.
하지만 트럼프가 누구인가. 세상의 혼란을 기회로 삼아 부를 쌓은 부동산 개발업자였고, 지난 집권기 백악관에서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워싱턴 정가와 뉴욕 월가 엘리트들의 제언을 가볍게 무시한 이단아였다. 트럼프는 집권 2기 행정부의 주요 인선을 끝낼 때쯤 제롬 파월 연준 의장 쪽으로 칼끝을 겨누기 시작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파월은 2018년 연준 의장에 임명된 트럼프 1기 인사다. 하지만 트럼프는 자신의 의사를 거스르며 고금리 기조를 유지한 파월과 번번이 마찰을 빚었다. 이후 트럼프는 2020년 대선에서 낙선했고, 파월은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살아남아 임기를 2026년 5월까지 보장받았다. 트럼프는 백악관에 돌아가면 파월과 1년4개월간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연준이 행정부로부터 독립적인 기관이고, 대통령에게 의장 임명권은 있어도 해임권은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 연준법에서 대통령이 의장을 해임할 권한은 무능, 직무태만, 직무유기 등의 예외적인 사유에만 적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연준 의장의 능력이나 태도를 문제 삼아 해임권을 사용한 대통령은 없다.
파월은 대선 이틀 뒤인 지난 7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기자회견에서 ‘미국 대통령이 의장을 포함한 이사진을 해임할 권한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스스로 물러날 의사가 없다는 얘기다.
트럼프도 “파월의 세 번째 임기는 없을 것”이라며 당장은 해임권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트럼프라면 연준을 흔들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이미 여러 아이디어가 나온다. 보수 성향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은 ‘프로젝트 2025’에서 연준에 부여한 ‘물가 안정’과 ‘완전 고용’의 두 가지 임무를 폐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연준의 배후에 ‘그림자 의장’을 실권자로 세워두고 파월을 레임덕에 빠뜨리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이 의견을 낸 인물은 헤지펀드 키스퀘어 최고경영자인 스콧 베센트다. 그는 인선 과정에서 유력한 재무장관 후보 중 하나로 지목됐다.
김철오 국제부 차장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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