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에 휩쓸린 민초들…이토록 기구한 삶이 있을까

나원정 2024. 11. 1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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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퉁소소리’는 조선 선비 최척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명·청 교체기의 전란통에 가족과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는 30년 여정을 담았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지난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한 연극 ‘퉁소소리’(연출 고선웅)는 조선시대 남원의 가난한 선비 최척(박영민)이 30년간 전란 통에 겪은 기막힌 이산가족사를 그렸다.

최척은 이웃 낭자 옥영(정새별)과 약혼하자마자, 임진왜란이 터져 징용된다. 간신히 돌아와 백년가약을 맺고 첫 아들 몽석(윤준호)을 얻지만, 또 다시 정유재란으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다.

옥영은 왜군 포로로 끌려가고, 핏덩이 자식마저 잃은 최척은 명나라 배에 오른다. 부부는 생각지도 못한 낯선 안남(安南·베트남) 땅에서 극적으로 재회한다. 명나라에서 둘째 아들 몽선(최아론)을 낳고 장가 가는 것까지 순탄히 봤건만, 이번엔 명·청 교체시기 최척이 명군에 징용되며 다시금 이산가족이 된다. 최척과 옥영의 재회를 번번이 이어주는 건 아득히 멀리까지 퍼져가는 최척의 퉁소 소리다.

싸리빗자루 말 등 조선 민초의 생활용품을 해학적으로 활용했다. 서술자 격의 늙은 최척 역은 배우 이호재(오른쪽)가 맡았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조선 중기 문인 조위한(1567∼1649)의 한문소설 『최척전』(1621)을 토대로 한 ‘퉁소소리’는 고선웅 서울시극단장이 각색·연출·예술감독을 맡아 초연하는 작품이다. 고 연출 특유의 해학적 말맛과 기세 넘치는 무대, 빠른 리듬의 전개가 공연시간 150분(인터미션 포함)을 가득 채운다.

이토록 기구한 가족사가 있을까, 숨 가쁘게 쫓다보면 위기를 돌파하는 끈끈한 가족애와 기지에 감탄이 절로 난다. 한바탕 마당극처럼 흥겹게 즐기다가도 30년 피란사의 농축된 애환이 물 밀듯 밀려와 눈시울을 훔치는 관객도 많다. 연극 ‘회란기’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귀토’,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등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고선웅의 대표작 계보를 이을 만하다는 평가다.

고선웅

개막 전 연습실 공개에서 고 연출은 “조선부터 일본·중국·베트남의 바다와 산을 넘나드는 여정 탓에 구상에만 15년 걸렸다”며 “『삼국지』를 보면 30만 대군, 50만 대군에 감동하는데,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아버지고 아들이다. 현재도 똑같다. 전쟁을 결정하는 건 위정자들이지만 나가 싸우는 건 민초들이다. 동어반복되는 위정자들의 우매함, 뻔뻔하고 집요한 전쟁의 폭력 속에 생명력으로 버텨낸 민초의 삶, 가족애를 돌아보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판자로 만든 크고 작은 선박들과 싸리 빗자루 말, 소쿠리·대나무로 장식한 각 나라 갑옷 등. 얼핏 엉성해 보이지만 인물과 서사에 충실한 만듦새다. “경제적인 방식으로 옛날 연극의 원형성에 충실하고 싶다”는 게 고 연출의 의도다.

최척·옥영을 제외하곤 대부분 1인 다역을 해낸 20명 출연진이 한·중·일 3개 국어가 뒤엉킨 대사로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 주인공 최척 역은 올 5월 500여명이 몰린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배우 박영민이 맡았다.

명나라 장수 진위경 역 등을 소화한 배우 이원희는 “고선웅 연출은 배우가 무대 위에서 ‘기호’로서 살아 숨 쉬도록 한다”고 말했다. 고 연출은 “겉절이처럼 소박하지만 식감이 살아있는, 분청사기처럼 투박하지만 한국의 멋이 밴 무정형의 자연스러움을 담고 싶었다”며 “정교한 연극을 거부하고 성기고 거친 연극을 만들고 싶다”고 전했다.

방대한 서사를 집중력 있게 이끄는 건 극 중 서술자인 늙은 최척(이호재)이다. 원작에서 저자가 최척이란 사람의 부탁으로 그의 삶을 기록한다고 밝힌 서술 기법을, 늙은 최척이 자신의 과거사를 들려주는 듯한 전개에 녹여냈다.

‘애원성’ ‘아스랑가’ 등 수천년 우리네 애환을 담은 민요 선율도 쓰였다. 퉁소를 비롯해 거문고·가야금·해금 등 국악기를 5인조 악사가 라이브로 연주한다. 장태평 음악감독은 “퉁소로 연주하는 민요 선율은 슬프다고 바로 울어버리지 않고 기쁘다고 방방 뛰지 않는다. 우리 산 등줄기, 강을 닮고 우리를 닮은 음악들과 함께 호흡했다”고 전했다.

“살아있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대사가 곧 ‘퉁소소리’ 주제다. 전쟁 와중에도 인간됨을 잃지 않는 민초들의 인연, 국적을 뛰어넘는 동병상련이 서로를 치유한다. 명군의 패전 소식에 남편의 유골이나마 찾겠다는 옥영의 결심을 아들 몽선보다 더 지지하는 이도 명나라 사람인 며느리 홍도(최나라)다. 홍도도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의 생사를 모르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메이꽌시(没关系), 다이조부(だいじょうぶ), 어머니 괜찮아!” 홍도가 생존을 위해 배운 3개 국어로 외치는 이 응원은 최척 가족의 마지막 해후를 염원하는 주문처럼 다가온다. 이를 좋아하는 대사로 꼽은 고 연출은 “다 지나간다는 것, 나아가 하늘이 무너져도 삶은 계속되고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연은 27일까지. 7세 이상 관람가.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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