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원폭' 다룬 다큐…베를린 영화제 초청되자 日 당황

나원정 2024. 11. 17.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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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개봉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
올초 베를린 초청때 日 민감 반응
日침략 피해 증언담은 10만ft 필름
조선인 피폭 피해자 침묵까지 담아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위안부, 강제노역, 원폭 피해자 등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온 재일조선인 2세 박수남 감독(오른쪽부터)이 딸 박마의 감독과 함께 작품화하지 못했던 10만 피트, 약 50시간 분량의 필름에서 끄집어낸 산 역사를 담았다. 사진 시네마 달, 푸른영상

“제가 만든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한을 품고 있죠.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 침략당한 우리 동포들의 쓰라림을 찾아가 기록하는 일이 너무 큰 고통이었습니다.”(박수남 감독)
13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희생자의 증언을 담은 작품이다. 재일조선인 2세 박수남(89) 감독이 딸 박마의(56) 감독과 공동 연출했다. 1985년부터 한국·일본의 증언자 100여명을 만나 기록한 고통의 역사는 16㎜ 필름으로 10만 피트, 50시간 분량에 달한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의 이중 고난을 기록한 첫 다큐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1986), 강제 징용 조선인‧위안부를 좇은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에서의 증언’(1991) 등을 연출한 박수남 감독의 다섯번째 작품이다.
그의 작품이 영화제가 아닌 국내 극장에서 개봉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개봉 다음날 서울 시청역 근처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은 "아흔살 돼서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작품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딸의 이름은 신라 멸망 후 고려에 귀의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마의태자에서 따왔다. 박마의 감독은 “일본 학교에서 식민 역사를 전혀 가르치지 않아 내가 일본에서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어머니의 일을 통해 내 정체성을 확인한 것이 인생의 좌표축이 됐다”고 말했다. 10대 때부터 어머니와 기록 작업 및 상영 운동을 함께해온 박마의 감독이 어머니의 건강 악화로 30년 간 창고에 틀어박혀 있던 필름들을 끄집어내 디지털 복원한 게 이번 다큐의 출발점이 됐다.


5살에 한복 입은 어머니와 日서 돌팔매 당해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에는 박수남 감독(오른쪽)이 재일조선인 1세대인 아버지부터 3세인 딸 박마의(왼쪽) 감독까지 3대에 걸친 재일동포의 저항과 고난사도 담았다. 이를 다큐로 전하기 위해 박수남 감독은 운영하던 식당 문을 닫고 카메라를 멘 채 한국과 일본 증언자들을 발로 뛰어 만났다. 사진은 박마의 감독이 어린 시절 모녀 모습. 사진 시네마 달, 푸른영상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재일조선인의 고난과 저항사에 더해, 관동 대지진 때 일본인 공장 동료들의 도움으로 생존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딸까지 대물림된 식민역사의 본질까지 다뤘다. 일본에서 태어나 천황이 신이라 믿었던 박수남 감독은 5살 때 처음으로 조선인 정체성에 눈떴다고 한다. 한복 차림의 어머니 손을 잡고 길을 가다 돌팔매와 함께 “조센징, 더러워. 돌아가!” 라는 혐오 발언을 듣고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어 1958년 일본인 여학생을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재일조선인 2세 청년 이진우 사건(고마쓰가와 사건)을 계기로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다시금 자문하게 됐다. 당시 이진우는 정신감정 없이 이례적인 속도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재일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 지식인들도 감형 탄원 운동에 동참했다.

한·일 정부가 외면한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에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에 피폭당해 시각장애가 생긴 재일조선인 1세 이영인씨가 이어 9일 나가사키 원폭에 한쪽 눈을 잃은 김정순씨와 마주 앉아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이다. 사진 시네마 달, 푸른영상
그가 이진우의 갱생을 위해 주고받은 옥중서신을 엮은 『죄와 죽음과 사랑과』(1963)는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듬해부터 재일조선인 1세를 취재하기 시작해 양국에서 외면당한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드러냈다. 피폭으로 몸이 썩어들어가 '문둥이' 소리를 듣고 시집에서 쫓겨난 김분순씨, 27살에 한쪽 눈을 잃은 김정순씨 등이다.
펜을 놓고 카메라를 들게 된 건 피해자들의 떨리는 몸, 고통스러운 침묵을 담기 위해서다. 지쿠호 탄광촌, 군함도의 강제 징용 피해자들과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의 빈민촌, 한국 거주 원폭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며 다큐를 만들어왔다.
이번 작품에선 일본 정부가 조선인 강제 노역 피해를 적시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군함도의 역사도 다뤘다. 14살 때 군함도 탄광에 끌려갔다가 미쓰비시 조선소로 옮겨가 피폭 당한 서정우씨의 생전 증언을 소개하면서다.

다큐 베를린 초청에 日민감 반응…"재일동포 여전히 식민지 살아"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에서 박수남 감독(오른쪽)이 최근 발굴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담은 그림을 보고 있다. 다큐에선 침략 역사를 교과서에서 지우고 혐오가 커져가는 일본 사회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사진 시네마 달, 푸른영상
지난 2월 베를린 국제영화제 포럼 스페셜 부문에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초청되자 일본 정부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주독 일본대사관이 영화제 측에 작품 정보를 문의하고 면담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일본 교도통신 보도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박마의 감독은 “국제영화제 같은 행사에 일본 정부가 개입하는 건, 일본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의 심각한 위기를 드러내는 징후”라고 지적했다. 박수남 감독은 “일본 정부는 조선인 위안부, 징용 등의 역사적 사실 자체가 없다며 뻔뻔하게 책임을 회피해왔다”면서 “재일조선인들은 여전히 식민지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의 역사 만행을 고발하는 다큐 제작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카메라는 영화에 나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이고, 심장이죠. 우리 모녀가 돈도 집도 없이 빚을 내서 살고 있지만, 우리 겨레의 한을 전하는 게 억울하게 죽어간 분들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되살아난 목소리’를 보고 우리 역사를 공부해주세요.”
박수남, 박마의 감독은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 이후로도 계속해서 증언자들의 기록 영상을 담은 . 다큐 제작을 이어갈 거라고 말했다. 사진 시네마 달, 푸른영상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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