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식물들 '결혼'까지 참견할 때 벌어지는 일
[김상목 기자]
▲ "씨앗의 시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필름다빈 |
카메라의 출발은 평택이다. 등이 잔뜩 굽은 한 남자 노인이 불편한 동작으로 느릿느릿 집 주변을 돌아다닌다. 자식들이 장성해 떠난 뒤 홀로 집을 지키는 모양새다. 집 바로 앞엔 자동차 도로가 나 있고, 고개를 들면 고속열차가 고가철교 위를 벽력같은 굉음과 함께 휙 지나간다. 시골다운 목가적 풍경과 거리가 멀다. 낡은 집 안팎으로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고물상을 방불케 한다. 그런 가운데 노인은 뭔가를 주섬주섬 열심히 챙기는 중이다. 찬찬히 살펴본다. 알고 보니 주변 곳곳 노지에 소중하게 씨앗을 심는 중이다. 저기에 종자를 뿌리면 과연 자라나긴 할까 싶을 그런 곳들에 묵묵히 한 알 두 알 세어가며 파종하느라 바쁘다.
이어서 카메라는 화순으로 향한다. 여성 농민들이 기다린다. 본전이 생각나서 심던 것을 계속 수확해 종자를 갈무리한 다음 다시 심어 왔다고 너스레를 부린다. 요즘 도시인 시선으론 내다가 버려도 주워가기는커녕, 폐기물 수거비용을 청구할 것 같은 낡은 서랍장이 마치 한약방 그것처럼 놓인 게 눈에 띈다. 알고 보니 소중하게 간직한 씨앗 창고다. 평택 할아버지는 그저 혼자 묵묵히 작업하느라 말수가 드물지만, 화순의 할머니들은 말동무가 그래도 옆에 한둘 있어서 그런지 분주한 작업 중에도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구수한 사투리를 통해 아마 생전 처음 들어볼 고유 작물 품종과 작업 때 구사하는 특유의 어휘가 펼쳐진다. '심는다' 의미의 '숭궈야' 같은 표현은 자막이 없다면 도무지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테다.
카메라는 대기업 종자가 장악한 현실 농촌에서 사라지는 전통의 토종 씨앗을 찾는 일행과 함께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수소문해가며 종자를 구매하지 않고 자급자족하는 이들을 찾는다. 실적은 신통하지 않지만, 간간이 마을마다 한둘은 꼭 있다. 대개 고령의 여성 농민들이다. 왜 번거롭게 매년 고단한 작업을 반복하냐 묻자 답은 한결같다. 노는 땅이 있고, 늘 심던 본전이 생각나고, 고유의 맛이 좋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무척 합리적인 입장이다.
이들은 '토종씨드림'이라는 단체다. 2008년부터 토종 종자를 수집하러 전국을 누비며 사라져가는 작물과 씨앗을 복원하는 활동에 매진한다. 하지만 고작 10여 년 만에 그들이 접했던 씨앗 지킴이, '씨갑시' 중 절반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는 상황이다. 더 늦추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이들은 구석구석 수소문해 꼼꼼하게 종자를 챙기고, 어디에도 없는 백과사전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조금씩 씨앗을 보급하고 있다.
▲ "씨앗의 시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필름다빈 |
평택 할아버지 농부의 등 굽은 채 영위하는 일상은 늘 변두리로 향한다. 그가 농사를 짓는 장소는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 농업의 풍경과는 아득하게 멀다. 도시인은 목가적 환상을 품기 일쑤지만, 실상 요즘 농사는 고도로 기계화되고, 기술과 자본집약 산업이 된 지 오래다. 물과 비료, 종자를 치밀하게 조합해 최적의 수확량과 함께 시장가격을 고려해야 한다. 생물을 취급한다는 것 빼면 본질은 공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소소하게 종자를 보존하고 자식들에게 먹으라고 나눠줄 겸 소일로 하는 농사는 마치 아득히 고대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노인은 자동차가 휙 하고 지나치는 도로변 가드레일 아래 두렁에 콩을 심었다. 어느새 절기 변화와 함께 줄기가 올라왔다. 그가 곳곳에 조금씩 심은 작물을 설명한다. '단수수'란다. 듣고 보니 사탕수수다. 마트에서 설탕을 사서 먹지 누가 사탕수수를 한국에서 심을지 했는데 바로 여기 있다. 무척 낯선 경험이다. 화순의 여성 농민들 입담에 실려 소개되는 토종 작물의 향연이 곧 이어진다. 토종 콩인 '돔부', 역시 전통 종자인 '이팥'은 물론 가늘고 길게 보존되며 계승되는 온갖 종자의 이름은 계보학을 따질 만큼 흥미롭다. '선비잡이콩' 어원은 대체 뭘까? '또아리호박'은 정말 또아리를 틀까? 구전되어 작명된 이름도 있지만, 이름 자체가 없어 즉석에서 이름 붙인 것도 있다. 콩이면 콩, 팥이면 팥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살짝 신비로울 정도다.
쉴 틈 없이 일하던 여성 농민은 넉살 좋게 웃으며 '인간인 내가 식물들의 결혼까지 참견'한다고 까르륵거린다. 하지만 농협 계약재배로 경작할 때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일이라며, 모종이며 종자며 다 제공되는 대신, 정해진 물량을 수확 때 내어줘야 하는 역학관계를 자조한다. 맛도 없고 특징도 없는 종자를 공장 노동자처럼 생산할 때와 분명히 다르다는 주장이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간간이 수확한 작물을 보며 '너무 웃기게 생겼어! 이거 어떻게 먹지?' 표정에는 생기가 가득하다. 임금노동에 익숙한 우리에겐 생경해진 '산 노동'의 현장이다.
▲ "씨앗의 시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필름다빈 |
소중하게 씨앗을 채집하는 그가 찬바람 피하고자 걸친 점퍼엔 '쌍용자동차' 로고가 떡하니 박혀 있고 주한미군 이전 관련 화제가 빠지지 않는다.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21세기 들어 평택이 어떤 공간으로 상징되는지 이해한다면 그저 들어간 이미지일 리 없다.
화순의 할머니들이 느리게 걷는 길가 주변엔 취지와 달리 적지 않은 폐단을 양산하는 태양광 발전 시설 반대 현수막이 엿보인다. 함께 작업하면서 여성 농민들은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에 대해 염려한다. 식자들의 담론이 아니라 그들이 체감하는 일상을 통한 체험담이라 더 묵직하게 꽂힌다. 예전에는 들깨꽃이 피면 이제 태풍이 더는 오지 않을 거라는 지혜가 통했는데, 온도가 올라가는 바람에 그런 상식이 이제 유효하지 않다는 자조다. 이제 그들이 평생 갈고 닦아온 세월의 축적된 경험이 위기를 맞은 것이다. 쑥국새가 울면 쑥이 날 때고, 꿩이 울면 취나물이 올라와 그걸 뜯으면 되었는데 이젠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작물과 종자 이야기만 해도 세월 가는 줄 모를 것 같은데, 카메라는 자연과 더불어 살던 이들의 고단한 삶을 포착하는데도 관심을 놓치지 않는다. 임금노동에 익숙한 우리 잣대로는 '노예'처럼 일하듯 보이는 여성 농민들의 일상은 자신이 원하는 노동을 원하는 조건에서 자유롭게 수행하는, 하지만 자연의 섭리를 놓치지 않는 자율성으로 형상화된다. 풀베기는 한 달에 한 번 할 때도, 주마다 할 때도, 매일 해야만 하는 시점도 각기 존재한다. 그걸 숙지하는 건 자연에의 순응인 동시에 삶을 영위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성평등과 계급의 문제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이팥' 종자를 거두며 할머니들은 이게 양이 많아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 부침개 해서 먹던 것이라 설명한다. 교과서에서 듣던 '구황작물'의 훌륭한 예시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 부자들은 안 먹고 아예 존재조차 모른다는데 그럼 빈부에 따라 먹는 게 다른 건가? 반문하듯 따라오는 여담은 그저 스치기엔 맵다.
평택 할아버지는 말수가 드물다. 그를 조명할 땐 유독 쓸쓸하고 뒷모습 위주로 포착한다. 우리가 상상하던 시골 할아버지의 어떤 고정관념과 그는 사뭇 다르다. 묵묵하게 제작진에게 밥 한술 뜨고 가라는 노인의 말투엔 외로움과 호의가 덕지덕지 묻어난다. 명백히 카메라는 사라져가는 세계의 표상으로 그를 상정한다.
▲ "씨앗의 시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필름다빈 |
그렇게 영화는 소비와 이윤 위주로 작동하는 세계의 바깥에서 명맥을 이어가는 대안적인 세계의 풍경을 은연중에 구현한다. 21세기 자본주의 시스템의 대척점, 노동과 생태와 페미니즘이 조화를 이룬 미약하지만 소중한 가치가 '미래의 씨앗'을 마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속 '시드키퍼'처럼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작업이다.
스발바르 제도 종자보관소는 바로 우리 곁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비로소 펄 벅의 '대지'에서 왜 왕룽이 당장 기근에 직면해서도 그렇게 종자에 매달렸는지, 2차 대전 당시 레닌그라드 포위전 때 파블롭스크 실험국 연구원들이 아사해 가면서 종자를 지켰는지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작품정보>
씨앗의 시간
Time of Seeds
2022|한국|다큐멘터리
2024.11.20. 개봉|101분|전체관람가
감독 설수안
출연 윤규상, 장귀덕, 이경희
제작 토란웍스
배급 필름다빈
2022 14회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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