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모건엔 있고 연준 공무원엔 없었다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보는 경영’]

2024. 11. 16.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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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잔여 책임자의 리더십
대공황이라는 위기가 들이닥쳤을 때, 경제 위기에 대비해야 할 연방준비제도 공무원들은 ‘잔여 책임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금융 위기의 피해 당사자가 아니었던 탓에, 적극적으로 개선에 나서지 않았다. 결국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이는 곧 심각한 경제 공황으로 이어졌다. (다산북스 제공)
이 세상 어떤 경제학자에게 경제사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을 하나 생각해보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 경제학자가 1929년 ‘대공황(Great Depression)’을 이야기할 것이다. 경제 위기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손님과 같은 존재지만 1929년에는 월가 금융기관과 미국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이유로 전 세계적인 재앙이 일어났다. 사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근본 원인 중 하나가 1929년 대공황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제사에서 대공황의 중요성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1907년도에도 미국 경제에 정말로 큰 위기가 닥쳤다. 소위 ‘1907년도 공황(Panic of 1907)’ 또는 경제 위기가 니커보커신탁회사(Knickerbocker Trust) 도산에서 시작됐기에 ‘니커보커 위기(Knickerbocker Crisis)’라고 불리는 경제 위기다. 2008년 미국 금융 위기가 리먼브라더스라는 투자은행 도산에서 시작됐듯 1907년에는 니커보커라는 큰 투자회사가 구리 산업 투자에 실패해 도산하면서 시작됐다. 잠재적으로 1907년 경제 위기는 1929년 대공황에 버금가는 피해를 끼칠 수 있었지만, 한 인물의 활약으로 단기간에 종결됐는데 그 인물이 바로 제이 피 모건(J.P. Morgan)이다.

1907년은 연방준비제도(FRB)라는 기관이 아직 탄생하기 전이다. 따라서 경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미국 금융계와 심지어 미국 정부도 이 경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월가에서 가장 영향력 큰 금융가였던 모건은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자신도 큰 피해를 본다는 생각에 뉴욕에 있는 자신의 저택 도서실에 금융계 인사 수십 명을 불렀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건은 도서실 문을 잠근 후 “대책을 마련하기 전에는 아무도 방에서 나갈 수 없다”고 선언했다.

금융권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은 사실 딱 하나다. 너무 부실해서 아무리 도와줘도 도산할 은행은 그대로 망하게 두고, 건실한 은행에는 자금을 빌려줘 도산을 막는 것이다. 모건은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은행을 도산시킨 후 아직 건실한 은행에 엄청난 자금을 공급해줄 것을 다른 은행에 제안했다. 건실한 은행들이 도산하기 시작하면 월가 어느 은행도 안전할 수 없다는 모건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었지만, 경제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자기도 돈이 필요한 다른 은행에 자금을 내놓으라는 것은 쉽지 않은 제안이었다. 결국 밤새도록 모건의 도서실에 구금 상태로 있었던 금융계 인사들은 새벽 5시경 어쩔 수 없이 모건 제안에 동의함으로써 풀려날 수 있었고 그렇게 미국 경제는 1907년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한 명의 민간인에 불과한 모건이 미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 미

국 정치인들은 결국 1913년 연방준비제도를 만들어서 경제 위기가 다시 닥치면 민간인이 아니라 정부가 위기 극복을 주도하도록 법을 통과시켰다.

1929년에 다시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월가 금융가들은 연방준비제도가 나서서 지시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정치권 눈치도 보는 등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했던 연방준비제도가 우물쭈물하다 대공황을 피하지 못했다. 1929년 연방준비제도 공무원들은 은행이 도산해도 자신들이 직접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닌 상황이었고 한편 너무 나서 월가를 도와주면 자칫 나중에 정치권과 국민에게 책임을 추궁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을 것이니 1907년 모건과 같은 신속한 행동은 어려웠을 것이다. 경제학에는 ‘잔여 책임자(Residual Bearer)’라는 용어가 있다. 조직 구성원들은 지위가 높든 낮든 각자 맡은 임무가 있다. 당연히 자신이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데 때로는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경우 누군가는 이런 실패에 대해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 최종적인 무한 책임을 지는 사람을 잔여 책임자라고 부른다.

삼국지연의를 읽다 보면 경제학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바로 적벽대전을 앞두고 망설이는 오나라의 군주 손권에게 그 부하인 노숙이 조언을 하는 장면이다. 당시 중국 최강의 군사력을 갖고 양자강 북쪽을 모두 점령한 조조는 양자강 이남을 차지하고 있던 손권에게 항복을 권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조조의 대군을 손권이 싸워 이길 확률은 매우 낮았다. 그래서 손권의 신하들은 대부분 손권에게 조조 제안을 받아들여 항복을 해야 한다 권했다. 그때 노숙이 혼자서 몰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와 다른 신하들은 조조에게 항복해도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조조는 아마도 우리를 자신의 신하로 삼아 벼슬과 땅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주군인 손권은 다릅니다. 주군이 항복한다면 당연히 오나라 군주 지위를 잃을 것이며 평생 핍박을 받거나 어쩌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손권이 바로 잔여 책임자라는 말이다. 오나라가 망했을 때 오나라 신하들은 그저 자신이 맡은 임무에 대해 책임을 지면 끝이며 향후 안락한 삶을 지속할 수 있겠지만, 국가 멸망의 잔여 책임자인 손권은 안락한 삶은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다. 결국 손권은 신하들 의견을 모두 무시하고 조조와 적벽대전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경제학자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논리를 편 노숙이 사실은 제갈공명보다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매일같이 일상적인 상황이 반복되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잔여 책임자가 할 일이 없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위기가 닥치면 일상적인 임무만 맡고 있는 일반 조직원은 감당할 수가 없어진다. 모든 책임을 지는 잔여 책임자의 지시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잔여 책임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첫째 실제로 실패했을 때 책임을 질 능력이 있어야 한다. 즉 실패를 하면 실제로 죽음을 당하는 정도의 타격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잔여 책임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 잔여 책임자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을 때 그의 후계자인 아들 히데요리는 다섯 살에 불과했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제압할 군대를 히데요리가 지휘할 수 없었기에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라는 큰 영지를 갖고 있는 부하 장수에게 총사령관을 맡겼다. 문제는 모리 데루모토는 전투에 패배해도 자신의 영지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피 흘리고 싸울 이유가 없는 인물이라는 것. 즉 모리는 잔여 책임자가 아니었다. 모리가 지휘하는 도요토미 군대와 도쿠가와 군대가 전투를 벌인 곳이 세키가하라이다. 지형으로 보면 도요토미 군대가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잔여 책임자가 아닌 인물이면서 총사령관이었던 모리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산 위에서 하루 종일 구경만 했다. 그 결과 잔여 책임자가 직접 군대를 지휘했던 도쿠가와에게 패배했다. 예상대로 도쿠가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적군의 총사령관 모리 데루모토를 용서하고 그대로 영주 지위를 유지하게 했다. 모든 조직은 정말로 자격이 있는 잔여 책임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정해놔야 한다. 조직이 제대로 유지되게 하려면.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4호 (2024.11.13~2024.11.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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