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 인기의 짜릿한 현실감, 배우 정은채 [홍종선의 신스틸러㉒]
과거를 현실로 불러와 오늘 고개 끄덕이게 하는 ‘설득’
정은채, 남역 배우 문옥경으로 분해 완성형 연기력 발산 ‘심쿵’
배우 정은채의 연기력이 이토록 깊고 차졌다니!
큰 키와 하얀 피부, 우뚝한 코에 짙은 속눈썹, 프랑스 파리지엥 느낌을 풍기는 이국적 분위기에 마음을 뺏긴 뒤 오래도록 좋아하는 배우로 심중에 저장돼있는 배우였고. 대체 불가능한, 도드라지게 다른 미모로 크고 작은 예술영화들에서 감흥을 불러일으켜 왔고. 지난해 영화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를 통해 이제 숙성이 끝난 된장 같은, 요거트 아니고 진정 된장처럼 깊은 풍미를 발산하며 한결 풍성해진 감성 연기로 ‘성장’을 확인시켰던 정은채.
나름 팬을 자청해 놓고도 배우 정은채 연기의 발효 과정이 완료됐음을 몰랐다. 드라마 ‘정년이’(연출 정지인, 극본 최효비, 제작 스튜디오드래곤·스튜디오N·매니지먼트mmm·앤피오엔터테인먼트)에서 문옥경으로 분한 정은채를 보며 그 캐릭터 완성도에 감탄 또 감탄, 그만큼 기자로서 반성 또 반성했다.
단순히 한국 여자배우에게서 보기 드문 신체 조건을 십분 살려 모든 배역을 여성이 소화하는 국극에서 남자주인공 역할을 한 것이 너무 딱 맞아떨어져서 감탄한 게 아니다. 그저 헤어 숏컷이든, 전통 한복이든 양복이든 세미 정장이든 남자보다 더한 소화력을 보여서가 아니다.
배우 정은채는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부터, 내미는 손끝과 내딛는 발끝부터, 국극 무대에선 당연하고 일상에서 뱉는 발화까지 온전히 ‘남자로서의 에티튜드’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인물 자체를 우리 눈앞에 데려왔다.
배우가 할 수 있는 ‘연기의 끝’을 보여주겠다는 듯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은 타이틀롤 정년이 역의 배우 김태리를 보면서는 ‘김태리 잘하지, 이번에 또 잘하네, 아니 더 잘하네!’ 하며 그의 대단함에 놀라지 않으면서.
마찬가지로 배우 정은채가 자신의 연기 인생을 통해 쌓아오고 닦아온 것을 갈아 넣은 문옥경을 보면서는 ‘와, 와아, 와!’ 감탄만을 연발한 것은. 김태리의 잘함과 계속된 성장은 알았고, 정은채의 대단함과 일취월장은 미처 몰랐던 미안함에서 연유한다.
사실 ‘정년이’에는 잘되는 작품들이 그렇듯 역시나 잘하는 배우, 새롭게 돋보이며 발견의 맛을 주는 배우가 한둘이 아니다.
라미란(강소복 역)은 그 폭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게 넓고, 문소리(채공선 역)는 그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게 깊고, 우다비(홍주란 역)는 어떤 인물에서나 통할 주연의 얼굴이 있음을 드러내고, 신예은(허영서 역)은 당찬 미모가 돋보이고, 김윤혜(서혜랑 역)는 개인적 인기보다 작품을 우선해 죽도록 얄미움을 떨치고, 이세영(백도앵 역)은 멋진 동굴 목소리를 보유하고 있음을 발견시키고, 승희(박초록 역)는 기대 이상의 연기력을 과시한다.
그래도 가장 눈길이 머물고 어서 또 나오기를 바라는 팬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는 정은채, 문옥경이다.
배우 정은채는 시청자를 극 중에서 펼쳐지는 ‘자명고’ 무대 위의 호동왕자, ‘바보와 공주’의 온달을 보며 문옥경에 전율하고 열광하는 객석의 관객으로 만든다. 상대적으로 출연 분량이 적어 목마름이 가중되니 애타는 팬심이 커지는 측면도 있다.
전 세계에 우리의 전통 국극을 알리고, K-팝 글로벌 인기에 ‘이유 있는 뿌리’를 각인시키고 있는 ‘정년이’.
의미 있는 이야기와 주제 의식을 갖춘 이 드라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배우들이 마치 실제 국극 단원이 되어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는 것으로 ‘설득’할 수 있을 만큼 모진 노력을 해야 했고, 의상과 세트 등의 미술과 국악과 양악을 아우르는 음악과 조명과 촬영 등의 제작진이 과거를 현실로 구현해야 했고, 감독과 연출진은 이 모두를 잘 이끌고 보존해 담아내야 했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용의 두 눈 역할을 하는 배역과 배우가 있으니 문옥경과 정년이, 김태리와 정은채다.
배역에 있어 문옥경을 앞세운 이유는 1960년대 당시 여성들만의 국극이 K-뮤지컬의 원조, 무대 종합예술로서 극강의 인기를 떨쳤고 그 중심에 매력적 배우가 있었음을 우리가 단박에 알게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배우 정은채가 해냈다.
우리는 정은채가 탄생시킨 문옥경을 보며 여성 국극의 인기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이 되어 짜릿하게 다가오는 환상을 맛본다. 지금도 ‘자명고’가 어디선가 상연되었으면 좋겠고, 그렇다면 달려가 문옥경을 보고 아니 정은채를 보고 환호하고 싶어진다. 그만큼 배우 정은채는 자신에게 맡겨진 캐릭터를 완벽하게, 멋지게 빚었다.
윤정년이가, 김태리가 한 시대를 호령하는 여성 국극의 남자주인공 배우가 될 때까지 수난을 겪으며 성장하는 동안 문옥경은, 정은채는 한편으로는 화려한 무대를 책임지고 무대 아래 다른 편에선 경쟁자 없이 스스로 최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고독에 휩싸여 방황하면서도 대한민국 뭇 여성의 마음을 녹이는 완성형 스타로서 우뚝 서야 한다.
그 막중한 임무를 훌륭히 해내고 있었는데, 지난 10일 방송된 10회 마지막에서 문옥경은 매란국극단을 떠나 영화계로 향할 것임을 알렸다. 진정 이대로 국극을 저버릴 것인가, 실제 현실처럼 여성국극은 전무후무한 스타를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 것인가. 아니면 정년이가 그랬듯, 잠시의 외도 후 다시 국극으로 돌아올 것인가.
드라마임에도, 마치 진짜 현실처럼 심장을 두근두근 애타게 하는 배우 정은채 표 문옥경의 선택을 어서 확인하고 싶다. 다행히 바로 오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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