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벤트에 '수꾸'까지…50만 수험생 웃게 한 이상한 문제집 [비크닉]
■ b.멘터리
「 브랜드에도 걸음걸이가 있다고 하죠. 이미지와 로고로 구성된 어떤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각인되기까지, 브랜드는 치열하게 ‘자기다움’을 직조합니다. 덕분에 브랜드는 선택하는 것만으로 취향이나 개성을 표현하고, 욕망을 반영하며, 가치관을 담을 수 있는 기호가 됐죠. 비크닉이 오늘날 중요한 소비 기호가 된 브랜드를 탐구합니다.
」
책은 작가와 독자가 소통하는 매개체입니다. 글쓴이가 말을 건네면 독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답을 던지죠. 여기에 문제집은 예외입니다. 분명 ‘책’이지만 학습이 목적이기에 일방적 가르침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 틀을 깨고 지속해서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문제집이 있습니다. 50만 수험생의 필수 교재이자 수능을 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풀어봤을 교재 『수능특강』입니다.
수능특강은 말 그대로 수능 연계 교재이고, 수험생이라면 당연히 사서 볼 수밖에 없죠. 교재 홍보가 크게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교재를 만드는 EBS는 2017년부터 매년 학생 투표를 통해 표지 디자인을 뽑고 있어요. 행사 홍보도 적극적으로 하고요. 지난 8일에도 어김없이 2026학년도 표지 선정 이벤트가 열렸습니다. 투표는 24일까지 진행되는데, 이미 6만명 넘는 학생이 참여했을 정도로 인기입니다(16일 기준).
이처럼 매출을 넘어 수험생과의 소통을 택한 수능특강, 그 이유가 뭘까요. 비크닉이 답을 듣기 위해 지난 6일 EBS 교재기획부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후보작 선정부터 까다롭다…투표 시작 전날까지 논의
표지 이벤트 시작을 이틀 앞둔 이 날, EBS 출판국은 바삐 돌아갑니다. 내부에서 진행하는 1차 표지 투표 마감일이기 때문이죠. 교재 디자인을 담당하는 업체들이 낸 다양한 시안을 두고 투표에 올릴 후보작들을 사전에 추리는 과정인데요. 후보작 순서 배치 역시 선정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보니 200여명 되는 직원들이 그 순서까지 투표로 결정한다고 해요. 이벤트 전날까지도 출판국은 문구나 디자인 적합성 여부를 고민한답니다.
표지 이벤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는 투표 콘셉트입니다. 올해는 롤드컵 챔피언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요. 지난해엔 화제의 방송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콘셉트로 잡기도 했죠.
그런데 표지 선정에 이렇게까지 힘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재우 EBS 콘텐트 기획자(CP)는 “수능 준비 시작을 기념할 수 있는 작은 축제로 수험생에게 재미난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이 CP는 화제가 된 2021학년도 펭수 표지부터 5년간 수능특강 교재를 기획했어요.
‘수꾸’부터 코스프레까지…밈 만드는 학습 교재
수능특강 표지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수험생이 1년 내내 가지고 있는 교재인 만큼 교재를 활용한 재미난 일들도 1년 내내 벌어져요.
혹시 ‘수꾸’라는 말, 아시나요?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처럼 취향을 담아 수능특강 표지를 꾸미는 일이에요. 좋아하는 아이돌 사진을 붙이거나 그림을 그려 표지를 재창조해요. 수꾸만 전문으로 하는 스티커 제작 업체까지 등장했죠. 수꾸 열풍에 EBS 내부에서도 수꾸 서비스 제공까지 고민했을 정도라고 해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매년 화제가 되는 의정부고 졸업 사진에 수능특강 표지 코스프레가 등장했어요. 코스프레 주인공인 김우현 학생은 “고등학교 3년 내내 수능특강을 지니고 다닌 데다가 직접 투표한 디자인이 표지로 선정돼 애착이 생겼다”고 전했습니다.
수험생들 사이에서 이런 소문도 돌아요. 수능특강 표지 디자인이 감성적이고 예쁠수록 수능 어려워진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표지 디자인이 선정되면 유튜브 등 각종 소셜미디어상에서 이듬해 수능 난이도를 예측하는 콘텐트도 많이 올라와요.
이 CP는 수능특강을 ‘굉장히 트렌디한 상품’이라고 표현합니다. 요즘 학생들의 학습 방식과 문화 트렌드가 복합적으로 담겼기 때문이죠. 타깃 고객이 매우 명확한 점도 수험생의 취향을 저격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렇다 보니 교재기획부에선 아예 트렌드 조사까지 나섰습니다. 학생∙선생님들과 대면 인터뷰를 하면서 수험생들의 생활 방식을 묻고, 각종 박람회를 찾아다니면서 트렌드를 파악하기도 하죠.
28년 된 수능특강…시작은 80년대 ‘과외 금지’
수능특강이 수험생만이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는 이유는 그만큼 오래된 역사 때문일 겁니다. 수능특강의 시작은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1970년대 후반에도 지금처럼 사교육의 폐해를 지적하는 움직임이 거셌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과외 금지 조치까지 내렸죠. 그러면서 ‘TV가정고교’라는 교육 방송을 매일 90분씩 진행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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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연계로 학습 트렌드 선도…한때 ARS 풀이 서비스도
수능특강은 수험생들의 학습 트렌드도 선도합니다. 수능에 직접 연계되는 문제들이 담기기 때문인데요. 공식적으론 교육부가 2011학년도 수능부터 EBS 교재와 연계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2000년대부터 지속해서 연계되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문제를 만드는 과정 역시 까다롭습니다. 한 권의 수능특강이 세상이 나오기까지 무려 14개월이 걸린다고 해요. 수십에서 수백 명 넘는 전문가가 매년 새로운 문제를 내고 검토하는 과정을 14단계 거쳐요. 수능 출제 위원들처럼 수능특강 문제 검토를 위해 전문가들이 모여 2~3차례 합숙하는 시간도 갖고요. 벌써 2027학년도 교재를 준비하는 이유죠.
과거 수능특강은 새로운 학습 방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초고속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진 TV를 통해 가정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었어요. 1990년대 후반엔 전화로 문제 풀이를 들을 수 있는 ARS 서비스도 있었습니다. ‘EBS 휴대폰 가정교사’라고 불리던 ARS 서비스는 당시 하루 평균 1만명 이상이 이용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해요.
수능특강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존재 이유는 항상 같았어요. 누구나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거죠. 이 CP는 “사교육 없이 수능특강 교재만으로도 수능을 준비할 수 있도록 좋은 책을 만드는 게 가장 큰 목표”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표지 이벤트는 수험생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수능특강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일이자 수능특강을 활용하게 될 사람에게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요. 새로 선보일 표지는 수험생들에게 또 어떤 즐거움을 선사할까요.
서혜빈 기자 seo.hyeb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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