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만세시위는 목숨을 건 독립운동이었다
[정만진 기자]
▲ 백곡3.1운동 97주년 합동 위령제 |
ⓒ 국가보훈부 |
홍범섭 등 10여 명 주도로 1919년 4월 5일 충남 청양군 정산면 장터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장터에 운집해 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700여 명이었다.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면서 행진하자 일제는 강제 진압에 나섰다.
총칼로 위협하는 일제 경찰의 저지에도 군중의 시위는 잦아들지 않았다. 마침내 일제가 총격을 가해 권흥규 등 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튿날인 4월 6일 장례식이 열렸고, 장례를 치르면서도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일제 총격으로 시위 참가자 현장에서 사망
이 시위 때 체포된 장두현은 4월 28일 청양헌병분견소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70도(度)를 즉결처분 받았다. 쉬운 말로, 재판까지 가지도 않고 파출소에서 곤장 70대를 맞았다는 뜻이다.
정산면 장터 만세운동 시위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알게 해준다. 첫째, 아직도 1919년만세운동을 '평화' 이미지로 이해하고, 만세시위 동참을 손쉬운 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7천여 명이 넘는 양민이 만세시위로 죽었다(국가보훈부,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 만세시위 참여는 목숨을 건 독립운동이었다.
만세운동은 평화 시위? 곤장 70대는 별 거 아냐?
둘째, '어떻게 재판도 없이 사람을 몽둥이로 70대나 팰 수 있어?'라는 생각은 당시 실정을 잘 알지 못한 탓이라는 점이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헌병에게 한국인을 그 자리에서 처벌할 수 있는 '즉결심판권'을 부여했다. 일제 헌병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불령 선인'은 언제든지 폭행할 수 있었다. 장두현에게 가해진 태 70대도 그에 따른 '합법' 조치였다.
'곤장 70대 맞는 일이야 나도 할 수 있다. 그 정도 맞고 독립유공자가 된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어!'라고 함부로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런 발언을 하는 행위가 경거망동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소설이 있다. 김동인의 1923년 발표작 '태형'으로,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기상!' 소리가 요란하다. 간수가 나타나 점검을 한다. 늦게 대답하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는 채찍질이 돌아온다. 모두들 그 사실을 익히 숙지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도 늦게 대답을 하던 영감은 채찍에 등을 얻어맞는다.
감옥 안은 너무도 덥다. 머릿속에는 독립, 민족자결, 부모, 아내, 아들 등 그 어느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물 마시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온몸에는 종기투성이다.
그들은 공판에 불려나가는 것이 제일 좋다. 공판에 불려나가 사형을 언도받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당장은 시원한 공기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공판에 불려 나가기만 애타게 바라고 있지만, 나오라는 호출 소리는 내내 무소식이다.
다섯 평이 못 되는 감방 안에 어떤 날은 사람이 스물, 어떤 날은 마흔씩이나 있다. 그러니 일부를 제외하고는 서서 잠을 잔다.
병이 들어 환자용 감방으로 옮겨가는 일도 자주 있다. 거기에는 물을 준다. 나는 어서 큰 병이 들어서 거기로 갔으면 하고 바란다.
어느 날, 영감이 공판에 불려갔다가 돌아온다. 태형 구십 대의 판결을 받았다. 그것을 다 맞고 나면 석방된다.
"이제 사흘 뒤면 담배도 마음대로 피우고 좋겠소." 하자, 영감은 "나이 칠십에 구십 대를 맞으면 죽소. 항소했지." 하고 대답한다.
나는 감방 안의 사람들이 다 듣게 "노망했소? 당신이 나가면 감방 안이 넓어져서 모두들 편해지는데 당신 죽을까 봐 그 생각만 하오?" 하고 떠들어댄다. 감방 안 사람들이 일제히 영감을 비방한다.
결국 영감은 태형을 맞겠다고 간수에게 자청한다. 영감은 매를 다 맞지도 못하고 죽어 버린다.
소설 속 영감은 태형 90대를 "다 맞지 못하고 죽"는다. 그런데 어찌 "태형 70대 맞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된다면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식으로 낮춰 말할 수 있을 것인가! 1919년 독립만세운동의 엄중함을 증언해주는 충남 정산면 장터 시위를, 장두현 지사가 타계일에 맞춰 독자 여러분들께 소개드린다.
'백곡 3·1운동 기적비' 비문도 소개드리면
충남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백곡2리 마을회관 옆에 '백곡 3·1운동 기적비'가 있다. 1985년 3월 1일에 세워졌는데,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의 '건립 취지'를 소개드리면 아래와 같다.
1985년 3월 1일 정산3·1독립운동에 참여한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주민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마을회관 옆에 백곡 삼일운동 기적비를 건립하였다. 기적비에는 백곡리 출신의 홍범섭 등 5명과 태형 90대를 받은 조종원 등 12명, 일경의 총칼에 중상을 당한 김필현 등 2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정산만세운동은 1919년 4월 5~6일간의 정사면 장날에 700여 명의 주민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 일경의 무력탄압에 많은 사상자를 낸 시위운동이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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