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의 악몽, 우린 잊지 않았다" 일본 반도체의 와신상담
굴지의 대기업·은행·언론사가 밀집해 ‘일본 경제의 심장’으로 불리는 도쿄 치요다구 오테마치. 일본 최대 인공지능(AI)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에 등극한 프리퍼드 네트웍스(Preferred Networks·PFN) 본사에 들어서자 붉은 빛 기판의 AI 반도체가 방문객을 가장 먼저 맞았다. PFN이 자체 설계하고, 대만 TSMC가 만든 ‘MN-코어’ 시리즈다.
PFN은 니시카와 토루 대표가 2014년 도쿄대 동료들과 함께 창업한 AI 스타트업이다. 니시카와 토루는 “반도체 설계에서부터 산업용 딥러닝 서비스까지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포함한 모든 AI 분야를 일본에서 자체 개발해 제공할 것”이라 말했다. 기업 가치는 이미 3000억 엔(약 3조원)을 넘어섰다. 미국 CNN은 PFN에 대해 “기술 혁신이 드문 일본에서 규모가 가장 큰 ‘테크 유니콘’이 탄생했다”고 평가했다. PFN은 이미 도요타·NTT·화낙 등 유수의 대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으며, 일본의 ‘AI 국가대표 기대주’로 떠올랐다.
TSMC말고도...파운드리 라이벌 또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미묘하게 분위기가 엇갈렸다. TSMC가 아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삼성의 파운드리 경쟁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일본 도쿄 본사에서 만난 PFN 관계자는 “올해 삼성에 생산을 맡겼던 칩은 양산용 제품이 아닌, 연구개발용 칩”이라면서 “향후 추론용 AI 칩은 일본에서 생산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8월 일본 금융그룹 SBI홀딩스는 PFN에 1000억원을 베팅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양측이 일본 내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한 칩 제조 공정에 협력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SBI 홀딩스는 대만 3위 파운드리 PSMC와 손잡고 8000억엔(약 8조원)을 투자해 일본 미야기현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 2027년부터 양산에 돌입한다.
日의 조용한 ‘반도체 와신상담’
한때 ‘반도체 패권국’으로 군림했던 일본은 AI 시대 반도체 제조 능력을 되찾기 위한 와신상담에 돌입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8월 규슈 섬의 집적회로(IC) 생산량이 24년 만에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최근 대만 TSMC가 규슈 구마모토현에 지은 1공장 건설비의 절반인 4760억엔(약 4조1000억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일본 주요 대기업이 모여 세운 첨단 파운드리 기업 라피더스에는 약 3조원을 투입한다.
일본 반도체 업계는 철저히 물밑에서 권토중래를 노리는 모양새다. 과거 미국을 자극해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처참하게 몰락했던 트라우마를 잊지 않고 있는 것. 최근 일본에 건설 중인 대부분의 반도체 공장이 미국 혹은 대만 기업과의 합작회사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라피더스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TSMC·삼성과 정면 승부할 생각은 없다”면서 “일본 내에서 필요한 AI 반도체를 위주로 맞춤 생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으로 몸을 한껏 엎드린 일본이지만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다시 지으려는 국가 차원의 지원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소재·부품·장비(소부장)가 강한 일본 기업들이 2나노미터 이하 초미세공정에 대한 실전 경험치를 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첨단 반도체 제조 도전이 당장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단순히 밑지는 장사로 끝나진 않을 것”이라 말했다.
도쿄=이희권 기자 lee.heek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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