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터지고 불편한데…29년 전 구닥다리 게임에 빠진 3040, 왜

이영근 2024. 11. 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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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넥슨이 출시한 게임 '바람의나라 클래식' 시작 화면. 바람의나라 클래식은 2000년대 초반 사용자환경(UI)과 캐릭터 디자인을 그대로 구현한 버전이다. 이영근 기자


" 시작 화면에 흐르는 게임 배경음악(BGM)을 듣는 순간 26년 전 PC방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
대기업 과장 홍모(41)씨는 요즘 퇴근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집으로 향한다. 어린 시절 즐기던 게임의 옛 모습을 간직한 ‘바람의나라 클래식’을 하기 위해서다. 홍씨는 “부모님 몰래 친구와 PC방에 다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며 “최근 마음이 지쳐있었는데 게임이 작은 활력소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28년 전 온라인 게임의 구(舊)버전 귀환에 30·40대가 열광하고 있다. 지난 9일 넥슨은 바람의나라 클래식을 선보였다. 2000년대 초반 사용자환경(UI)과 캐릭터 디자인을 그대로 구현한 버전이다. 1996년 첫선을 보인 바람의나라는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1세대 온라인 게임이다. 지난 2011년 최장수 상용화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넥슨 관계자는 “많은 분이 추억하는 그때 그 시절을 재현하고자 시작된 프로젝트”라고 했다.

바람의나라 클래식은 출시 5일 만에 누적 접속자 31만 명을 기록했다. 향수를 공유하려는 30·40세대가 주축이다. 277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인기 유튜버 감스트(본명 김인직·34)는 9일 바람의나라 클래식 오픈런 라이브 방송을 켰다. 감스트는 “(60시간 이용권이 사은품인) 바람의나라 공식 가이드북을 사려는데, 아빠가 안 사줄까 봐 역사책이라고 거짓말했던 그때 그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시청자들도 “진짜 오랜만이다”, “옛날 감성 제대로다”라며 저마다 옛 추억을 끄집어냈다.

기자도 바람의나라 클래식을 직접 플레이해봤다. 한때 이용자가 넘쳐나 "넥슨은 다람쥐를 뿌려라"를 외치곤 했던 왕초보사냥터는 한적했다. 이영근 기자


21년 전 처음 바람의나라를 접했던 기자도 게임에 접속해봤다. 오래전 게임을 복원한 만큼 이용자 편의성은 떨어졌다. 캐릭터가 성장하는 ‘레벨 업’을 위한 사냥까지 한세월이었다. 게임 내 퀘스트(임무)도 최근 버전과 비교하면 단순했다. 이동할 수 있는 맵(공간) 역시 제한적이었다. 도사(道士) 캐릭터를 키우고 있는 닉네임 ‘바다나라’는 “여러모로 불편해서 16년 전에는 어떻게 플레이했나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런데 30·40세대는 “그 불편함이야말로 낭만”이라고 말한다. 직장인 박요한(33)씨는 “속도와 편의성을 강조한 요즘 게임은 그만큼 쉽게 질린다. 바람의나라는 그룹 사냥을 해야 하는 등 불편하고 느리지만 오히려 성취감도 있고 재밌다”고 말했다. 그에게 게임은 인생을 공부한 수단이기도 했다. 박씨는 “어릴 때 게임 사기를 당해 아이템을 잃은 적이 있다. 일종의 예방주사를 맞은 셈이라 사회에 나와선 사기를 당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온라인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17년 전 이용 환경을 그대로 복원한 '메이플랜드'가 20·30세대에게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메이플랜드 홈페이지 캡처


장수 인기 게임 지식재산권(IP)을 재활용해 향수를 자극하는 움직임은 게임 업계에서 새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10월 넥슨은 인기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복각판 ‘메이플랜드’를 내놓았다. 메이플랜드는 지금까지 누적 접속자 150만 명을 달성할 정도로 20·30세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엔씨소프트는 2020년 인기 게임 ‘아이온’의 초창기 버전을 재현한 ‘아이온 클래식’을 출시한 뒤 현재까지 서비스 중이다.

복고(레트로) 열풍을 ‘네버랜드 신드롬’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선정한 이 현상은 ①돌아감(Return) ②머무름(Stay) ③놂(Play)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고물가, 녹록지 않은 직장 생활 등 팍팍한 현실에 지친 어른들이 잠깐이나마 옛날로 돌아가 게임을 즐기면서 안식을 누린다는 분석이다.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유년기 노스텔지어를 추구하는 것을 금기시하지 않고, 오히려 인정하고 장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며 “갈등이 많고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사회에서 유년기 즐겼던 게임과 캐릭터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무해한 대상이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영근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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