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객석 눈물바다 만든 80대 고백…무대가 어루만졌다
무대 위에 선 노인 6명이 줄을 지어 원을 그리며 돈다. “한 바퀴 돌 때마다 10년씩 과거로 돌아가는 겁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목소리에 따라 과거로 회귀한 노인들이 당시 자신의 나이와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14일 오후 2시 서울 노원구청 소강당에서는 노인 대상 심리극(사이코드라마) ‘나의 무대·나의 이야기’가 진행됐다. 공연의 주인공은 막내아들의 국제결혼으로 수십 년 전 생이별 송은헌(80)씨다. 송씨의 아들은 1999년 30세에 네덜란드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송씨는 이후 아들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이날 무대 위에서 노인 6명은 각자 역할을 맡아 송씨가 아들과 헤어지던 상황을 재현했다. 속마음을 털어놓기 위해 사실과 다른 연극적 장치도 넣었다. 실제로는 송씨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들은 회사 일을 하느라 송씨를 배웅하지 못했지만, 연극에서는 송씨의 아들이 송씨를 배웅하는 장면을 넣었다.
송씨는 20년 전 아들에게 건네지 못한 속마음을 뒤늦게 털어놓고 울먹였다. 그는 “아들아, 돌이켜보면 남편과 장남 뒷바라지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잘하던 살가운 딸 같던 너는 뒷전이었던 것 같아 미안하다”며 “이역만리에 너를 두고 가는 게 내 분신을 두고 가는 것 같다. 그래도 너를 위해서 보내줘야하니 앞으로 네 꿈 훨훨 펼치며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객석에서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날 연극을 관람한 윤영록(64)씨는 “자녀가 결혼하면서 제주도로 이사 가게 됐을 때 생각나서 눈물 흘렸다”고 말했다.
이날 연극 진행을 맡은 김주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그냥 과거 일을 머릿속으로 회상하는 것과 그 당시 감정을 말로 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며 “연극적 작업의 특징은 생생한 체험이다. 몸으로 움직이며 감정을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이날 주인공을 맡은 송씨는 “이번 연극을 통해 내 마음을 다시 한번 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그때 상황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됐고, 이번 경험을 계기로 앞으로 더 활기차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노원구청 관계자는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노인들의 사회적 관계 축소와 갈등, 우울 등 감정을 한 축으로 했다”며 “한글을 읽지 못하는 어르신의 한이나 자녀와 갈등이 심한 노인의 우울감 등 다양한 주제들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노원구는 지난해부터 국내 지자체 최초로 노인 심리 상담센터를 직영으로 운영하고 있다.
기존 지자체에서 비행 청소년, 성폭력 피해자 등을 대상으로 사이코드라마 진행한 적은 있지만 65세 이상 노인 대상으로 한 사이코드라마는 처음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따르면 65세 이상 우울증 환자 수는 2018년 24만 8712명에서 2022년 26만 6493명으로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전체 우울증 환자의 35.69%(2021년 기준)는 60대 이상이라는 집계도 있다. 김주현 전문의는 “집단상담 문화가 척박한 국내에서 노인을 대상으로 한 첫 시도로, 노인 인구가 폭증하는 한국 사회에 의미 있는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신혜연 기자 shin.hye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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