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 기자의 안녕, 나사로] 무게를 견뎌내는 힘 ‘온기’
“어렸을 땐 까맣고 젊어서는 빨갛고 늙으면 하얘지는 게 뭘까.” 최근 서울 노원구 상계동 언덕길을 오르며 아이에게 물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가 된 양 골똘히 머리를 굴리던 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젊었을 때 머리를 빨갛게 염색한 사람인가.” 터져 나오는 웃음과 함께 다시 물었다. “오늘 우리가 만나러 가는 게 뭐지.” 재차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아이는 의아하다는 듯 답했다. “연탄?”
그럴 만했다. 생전 연탄은커녕 보일러도 한 번 만져본 적 없는 아이의 기억 저장소에는 불붙은 연탄이 붉게 타오르다 재가 되는 과정이 입력돼 있을 리 없었다. 연탄의 생애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서야 아이의 고개는 ‘갸우뚱’에서 ‘끄덕임’으로 바뀌었다. 오빠, 엄마와 함께 나선 초등학교 3학년 딸의 첫 연탄봉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점점 커지는 호기심, 언덕을 오르며 차오르는 숨이 임계점에 도달할 때쯤 우리 가족은 3000장이 쌓아 올려진 연탄 더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연탄 한 장은 무게가 어느 정도 될까요. 3.65㎏입니다. 그렇다면 연탄 하나엔 몇 개의 구멍이 뚫려 있을까요. 예전에 19개가 뚫려 있을 땐 줄여서 구공탄이라 부르기도 했고요. 지금은 스물두 개가 뚫려 있어요.”
연탄은행 안내자의 설명에 몇 개의 숫자를 마음에 새겨 넣고는 저마다 자기 몸뚱이에 걸맞은 지게를 어깨에 졌다. “어린이들은 두 장 정도가 적당하다”는 안내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이에 질세라 오빠는 “하나 더”를 외친다.
“이 정도는 거뜬하다”는 초등생의 허세는 오르막 내리막이 교차하는 좁은 골목을 오가는 사이 점차 기세를 감췄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지게에서 혹여나 귀한 연탄이 떨어질까 걱정돼 말수도 점점 줄었다. 정적을 깨운 건 아빠의 초등생 시절 이야기다. 손수레에 담긴 채 골목 어귀마다 수백 장씩 쌓아 올려지던 연탄들, 한겨울 눈싸움만큼이나 스펙터클했던 또래 친구들과의 연탄재 던지기 놀이, 얼어붙은 동네 오르막길에 할아버지 손 잡고 부순 연탄재를 뿌리던 장면들이 걸음마다 펼쳐졌다.
시인 안도현은 그의 시 ‘연탄 한 장’에서 얘기한다.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라고 말이다.
남매는 제 몸통보다 큰 지게에 연탄을 짊어진 채 평평한 등굣길과는 사뭇 다른 가파른 길들을 오르내리며 콧등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 볼이며 콧등, 손등에 남겨지는 거뭇한 흔적들을 경험했다. 몸으로 새긴 것보다 더 소중한 경험은 마음에 새긴 말들이다. 골목을 지날 때마다 세월의 주름 속에 온기를 머금고 “예쁘다 착하다 고맙다 대견하다”며 아이들을 향해 입이 마르도록 쓰다듬어 주시는 어르신들이 계셨다. 그 정겨움이 연탄 나르기를 거듭할수록 숨이 가빠지고 허벅지가 땅길 때마다 절로 숙여지던 고개를 다시 들게 했다.
성경은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벧전 4:11)고 말한다. 이론적으로 연탄 한 장은 100㎏짜리 역기를 1만 번 들 힘을 낸다고 한다. 연탄을 나르는 동안 평소 가방에 책 몇 권 넣고도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가던 아이들의 등하굣길이 떠올랐다. 이날 아이들이 3.65㎏짜리 연탄들을 지게에 메고 움직이게 한 힘은 그 연탄이 붉게 타올라 36.5도를 지켜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힘이었을 것이다.
안도현은 또 말한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이라고. 성경도 거듭 말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은 이웃에게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니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에서 온다”(갈 5:11~13)고 말이다.
글·사진=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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