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아이를 위한 나라

전성필,산업1부 2024. 11. 16.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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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필 산업1부 기자


지난주 돌을 맞은 아이를 데리고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이가 먹을 이유식과 기저귀, 옷가지와 간식 등을 챙기다 보니 중형 캐리어가 가득 찼다. 우리 부부의 짐은 가볍고 간소한데 아이를 돌보기 위한 짐은 종류도 많고 무거웠다. 아이를 태우고 다닐 휴대용 유모차까지 더해지니 우리 부부 두 사람의 팔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이제 걸음마를 배우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아이의 활동성까지 더해졌다. 우리 부부는 집에서 나온 지 5분 만에 자신만만하게 여행을 가기로 한 선택을 후회했다.

그러나 이때의 후회는 시작에 불과했다. 택시를 타고 KTX 광명역으로 이동하니 수유실과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는 고행이 시작됐다. 광명역은 동편과 서편으로 대합실이 나뉘어 있는데, 아이의 기저귀를 갈 수 있는 수유실은 서편에 있었다. 하필 동편에서 택시를 내린 우리 부부는 수유실을 향해 역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수유실에서 나온 뒤엔 KTX 열차 탑승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2개의 엘리베이터를 찾아야 했다. 대합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을 내려간 뒤 다시 역 중앙통로로 이동했고, 이곳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다시 열차 탑승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캐리어와 유모차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여정은 길고 복잡했다. 그나마 이동하는데 장애물이 없는 편안한 역사 공간이라 피로감이 덜했다.

열차를 타는 과정도 험난했다. 아내는 아이를 안고 있어 손이 부족했고, 캐리어와 유모차를 동시에 들어 높은 KTX 열차 계단을 올라야 했다. 심지어 부산행 KTX 열차는 만원이었다. 입석 승객이 짐을 놓을 수 있는 열차 복도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캐리어와 유모차를 다른 승객과 부딪히지 않고는 도저히 탑승할 수 없었다. 열차 내에는 캐리어를 놓을 공간이 부족했고 당연히 휴대용 유모차를 접어 넣을 수도 없었다. 짐을 놓을 공간을 찾기 위해 객실과 복도를 수차례 오가야 했다. 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것은 주변 많은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 일이라는 데 서글픔이 밀려왔다.

여기까지의 과정은 오히려 가벼운 후회에 불과했다. KTX 부산역에서 내려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맛집으로 알려진 식당은 2층에 있었고 식당이 있는 오래된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없었다. 아내가 다시 아이를 안았고, 나는 캐리어와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부산의 거리 곳곳은 울퉁불퉁했고, 유모차가 위로 솟은 보도블록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 경사로 없이 계단만 있는 건물이나 골목길이 많아 이동을 포기하기도 했다. 부산 지하철을 탈 때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수백미터를 걸어야 했고, 그나마도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평범한’ 인파를 뚫어야 했다. 군중 속에서 아이의 안전을 신경 쓰지 못하는 상황도 많았다. 아이와의 부산 여행은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부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 도심지에도 유모차나 휠체어가 이동할 수 없는 길이 즐비하다. 한국에서 가장 사람이 살기 좋고 인프라가 발전했다는 제1·2 도시의 현주소다. 서울과 부산이 이런데 인프라가 낙후된 다른 지역에선 아이와 이동하는 게 얼마나 어려울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 동료가 “러닝이 가장 비싼 취미”라고 말했다. 낮이든 밤이든 몸에 무리가 가지 않고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진 지역에 살아야만 할 수 있는 취미라는 이유에서다. 조명 하나 없는 비포장도로를 매일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도로 인프라가 갖춰진 곳은 신축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 신도시, 공원 인근 지역이 대부분이다. 대부분 집값이 높은 곳으로 꼽힌다. 취미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도 인프라와 경제적 격차에 좌우되는 것이 현실인데 아이를 낳는 것은 얼마나 많은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걸까.

많은 이들이 저출산의 해법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것이라고 쉽게 말한다. 단순히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나 집이라는 거주 공간을 가지는 것으론 부족하다. 아이와 함께 언제든 산책할 수 있는 도로의 편리함, 아이와 추억을 쌓으러 국내 방방곡곡을 다닐 수 있는 이동의 자유 등이 포함된다. 작게는 힘을 들이지 않고 집 앞 건물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경사로까지. 아이와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가 모두에게 보장되지 않은 사회에선 아이는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해진다. 아이를 위한 인프라를 먼저 갖추는 것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용기의 밑바탕이 아닐까.

전성필 산업1부 기자 f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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