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만에 돌아온 '글래디에이터' 속편, 사라진 정체성

김성호 2024. 11. 15.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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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881] < 글래디에이터 2 >

[김성호 평론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위대하단 말이 어울리는 영화가 있다. 영화예술이 이룩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 보는 이의 마음에 파고들어 가치관이며 세계관, 삶 전체를 뒤흔들어 내는 작품이 세상엔 있는 것이다. 인생 영화라 불리는 작품들, 누군가에게 일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영화가 꼭 그렇다.

한 해에도 수천 편의 영화가 쏟아지지만, 이와 같은 영예를 얻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우연히 어느 한둘의 마음에 가닿은 수준을 넘어 그를 본 이들이 입을 모아 찬사를 쏟아내는 작품, 그런 작품만이 걸작이란 칭호를 얻는다.

수년을 통틀어 몇 편 볼까 말까 한 걸작 중 하나가 <글래디에이터>라는 데 반대할 이는 얼마 되지 않을 테다. 거장이라 불리우는 리들리 스콧, 그의 긴 필모그래피 가운데 단연 손꼽히는 작품이 바로 이 영화다. 가히 이 영화를 만나기 위해 연기를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러셀 크로우가 제 정점이 될 연기를 펼쳤고, 훗날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반열에 오르는 호아킨 피닉스 또한 영화역사에 길이 남을 배역을 연기했다. 이를 통해 영화는 반세기 전 스탠리 큐브릭의 <스파르타쿠스>가 이룩한 성취를 뛰어넘는 걸출한 작품이 됐다.
 <글래디에이터 2>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굳이 속편을 만들었어야 했나

<글래디에이터>가 2000년 작이니 나온 지 24년이 지났다. 현명하고 의로운 장수 막시무스(러셀 크로우 분)는 로마의 마지막 성군이라 해도 좋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 뒤 노예로 전락한다. 선제가 적자인 자신이 아닌 한낮 장수에게 권력을 주기로 하자 왕자 코모두스(호아킨 피닉스 분)가 분노를 느낀 것이다. 노예가 된 막시무스는 검투장에 끌려와 매일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벌인다. 잔인하고 옹졸한 황제와 민중의 영웅으로 떠오른 검투사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 나아가 제게 주어진 참담한 운명에 불굴의 의지로 맞서는 막시무스의 모습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한다.

막시무스의 장렬한 죽음으로 더없이 온전하게 끝마쳐진 영화다. 영화가 거둔 세계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속편에 대한 논의가 나오지 않은 건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막시무스와 코모두스가 죽었고, 로마의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검투사들은 자유를 얻었으므로. 여기에 무슨 말을 더 한들 사족으로 비칠 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콧은 제게 가장 큰 영예였던 이 작품을 그저 단편으로 놓아두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상업영화 감독 중 한 명인 그는 또 다른 대표작 <에이리언> 세계관을 구축하려다 크게 낭패를 보았을 때처럼 <글래디에이터> 또한 내버려두지 못했다. 막시무스도 코모두스도 없는 가운데 속편을 준비했고, 마침내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 글래디에이터 2 >의 막을 올려버렸다.

이야기는 막시무스가 죽고 20여 년이 흐른 뒤의 로마다. 로마는 쌍둥이 황제 게타(조셉 퀸 분)와 카라칼라(프레드 헤킨저 분)가 지배하고 있다. 정복 전쟁에 열을 올리는 이들 황제의 야욕으로 로마는 거듭된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군단이 매번 개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딱히 필요치도 않은 땅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것이 로마에 득이 되지는 않는다. 그 반감이 언제고 로마를 상대로 폭발할 것이란 걸 생각할 줄 아는 이는 누구나 우려하는 것이다.

노예가 된 장군, 검투사 되어 맞서다
 <글래디에이터 2>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전쟁이 끝나면 패전국 사람들은 노예가 된다. 개중 쓸만한 이들은 로마로 옮겨져 제게 맞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한노(폴 매스칼 분)는 로마에 의해 멸망한 나라의 장수다. 한노와 그 아내가 모두 장수로 쳐들어온 로마군에 맞서 맹렬히 싸웠으나 끝내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성이 함락됐다. 아내는 화살에 맞아 성벽 아래로 추락해 죽었다. 살아남은 한노만이 가슴 가득 원한을 품고 로마로 끌려온다. 뛰어난 무예를 가진 장수였으니 검투사로 제격이다. 검투사들을 키우는 야심가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 분)의 눈에 띈 한노는 그에게 팔려 검투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영화는 검투사가 된 한노가 거듭된 위기 가운데 살아남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전작 <글래디에이터>와 마찬가지로 황제와 노예인 검투사가 대립각을 세우는 과정이 여전히 반복된다. 카라칼라와 게타 황제의 무능과 폭정,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야심가 마크리누스의 음모, 한노의 출생 비밀과 <글래디에이터>의 볼거리인 검투시합이 이야기를 밀고 끌며 앞으로 나아간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제정의 한계를 절감하고 로마를 공화정으로 되돌리려 했다는 이야기가 극의 토대를 이룬다. 황제의 격에 따라 국가 전체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코모두스 사망 뒤 다섯 명의 황제가 연달아 등극하는 사실상의 내전기가 열리고, 이를 평정한 장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간신히 질서가 잡힌 시대다. 게타와 카라칼라는 세베루스의 두 아들로, 영화는 이들을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쌍둥이로 설정하여 로마를 다시 혼란에 빠뜨린 원흉으로 그린다.

< 글래디에이터 2 >는 전작이 이룬 영화적 설정을 고스란히 따라 걸으려는 시도인 동시에, 그 이야기를 계승한 속편이고자 한다. 전자는 노예 출신 검투사가 황제와 갈등을 빚고 로마 민중의 영웅으로 떠오른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후자는 주인공인 한노가 알고 보니 막시무스와 황제의 누이였던 루실라(코니 닐슨 분)의 아들이었다는 설정을 두었단 점에서 그렇다.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못한 채로 전작과 닮은 이야기를 그 후계를 통해 답습하도록 한 결정이 < 글래디에이터 2 >의 정체성을 이룬다.
 <글래디에이터 2>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닮게 만드는 게 목적? 차별점 있었어야

영화가 그린 로마는 한때는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그 빛나는 정신을 모조리 잃어버린 천박한 세상이다. 공화정이 로마를 빛나게 했고 제정이 그를 망쳤다는 단순한 시각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권위를 빌어 작품의 중심을 관통한다. 막시무스로부터 한노, 즉 막시무스의 아들인 루시우스에게 이어지는 정신이 꼭 그와 같다. 어느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르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공화정을 다시금 수립해야 한다는 의지가 한노에게 굳건히 있는 것이다.

한노와 같은 이들에게 로마는 구린내 나는 국가다. 가만히 있는 주변국을 침략해 재화를 빼앗고 주민을 노예로 삼는다. 내정 또한 엉망이어서 귀족은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고, 노동은 노예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시민의 불만은 검투시합과 같은 잔혹한 방식으로 해소한다. 로마 출신인 한노에게서 주변인이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또 한노가 그에 대해 실제로 제 냄새가 그렇다고 말하는 대목은 그가 실제로 로마인이란 사실을 암시한다.

다만 영화는 전작과 그 구성을 닮게 하는 데 급급해 전작에서도 다소 아쉬웠던 캐릭터와 서사의 개연성 문제를 더욱 크게 노출한다. 이를테면 생의 대부분을 보낸 땅이 로마 침략군에 의해 정벌당하고 제가 사랑했던 이들까지 무참히 살해당했음에도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얼마 갖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실은 제가 적통 로마 황제가 될 태생이었단 믿기 힘든 이야기로부터, 실제 피부를 맞대고 관계를 나누었던 이들의 원한조차 한순간에 잊어버린다는 게 황당하기 짝이 없다.
 <글래디에이터 2>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로마 사극 재현, 꼭 이래야 했나

무엇보다 영화는 전작의 웅장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얼마 살려내지 못한다. 이는 러셀 크로우와 호아킨 피닉스의 존재감을 그와 대칭되는 배우들, 즉 폴 매스칼과 조셉 퀸, 프레드 헤킨저 등이 전혀 채우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전작에 없었던 역할인데 다소 극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마크리누스를 흑인으로 설정하고 그가 로마에서 입지전적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그린 것 역시 아쉬움이 남는다. 할리우드가 최근 몇 년간 흑인배우 출연을 의도적으로 늘려왔지만, 극의 맥락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하지 않을까.

여러모로 < 글래디에이터 2 >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 전작을 닮은 작품을 만들려 했으나 아류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검투사란 설정이 같을 뿐, 막시무스와 루시우스, 또 코모두스와 쌍둥이 황제 사이엔 감히 비하기도 민망할 만큼의 격차가 있다. 굳이 이 이야기를 완전했던 전작에 붙이는 작업이 필요했는지 묻고 싶다.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커버넌트>로 불필요한 사족을 붙였단 비난을 샀던 스콧이 이번에도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고야 말았다. <글래디에이터>를 아끼는 만큼 이번 속편은 싫어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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