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이는 공간, 산울림 소극장 [공간을 기억하다]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40년의 시간이 머무르는, 산울림 소극장
버스 정류소 이름은 주로 그 마을의 지명이나 교통시설, 관공서, 백화점 등의 대형상업시설 등 해당 지역을 대표하는 시설의 이름을 사용한다. 서울 홍대와 경의선 책거리 사이에 위치한 마을버스 정류소 이름이 ‘산울림 소극장’으로 지정된 건, 이곳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오랜기간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산울림 소극장은 40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도를 기다리며’ ‘위기의 여자’ 등으로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아왔다. 한때 서울의 대표적인 약속 장소 중 하나였고, 이곳에서 공연을 본 이들이 연극 배우를 꿈꾸게 된 장소이기도 하다.
울창한 가로수 사이로 보이는 붉은 벽돌의 건물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긴 시간 빛에 노출돼 채도가 떨어진 벽돌, 칠이 벗겨진 간판 그리고 공연장으로 내려가는 길 삐걱대는 나무 바닥, 입구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이곳을 스쳐간 수많은 배우의 얼굴까지. 1985년 3월 이곳에 들어선 산울림 소극장은 무려 4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며 마포 문화예술의 상징으로 존재하고 있다.
산울림 소극장은 지난 5월 작고한 ‘한국 연극계 대부’ 고(故) 임영웅 연출이 이끈 극단 산울림의 전용극장으로,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의 건물에 들어섰다. 이 극장, 저 극장을 빌려 무대에 서던 극단을 위해 임 연출이 마련한 보금자리였다. 당시 소극장들이 대부분 기존의 건물을 극장으로 꾸민 것과 달리, 최초로 극장을 주목적으로 설계된 건물이었다.
1층에는 일반 대중은 물론, 공연 관객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단순히 커피만 파는 공간을 넘어 전시와 음악, 연극, 낭독, 무용 등 다양한 형태의 전시와 공연이 이뤄지기도 한다. 2층은 지난 2016년부터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와 아트샵, 공방이 어우러진 ‘아트 앤 크래프트’로 운영되고 있다.
이 건물의 정체성과도 같은 산울림 소극장은 어깨가 닿을 듯한 좁은 계단을 비집고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일반적인 프로시니움(액자틀) 형식의 소극장과 다른 무대 형태다. 로마의 원형극장처럼 낮은 원형 무대를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80석의 객석이 둘러싸고 있다. 객석에서 무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로, 관객들은 온전히 배우와 호흡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배우에겐 그만큼 부담이 큰 무대다. 산울림 소극장에 올려지는 작품의 완성도와 배우들의 기량에 대한 자신감이 발현되는 공간이다.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그들의 시간이 깃든 공간”
임영웅 대표는 극단 산울림을 통해 ‘고도를 기다리며’를 1969년부터 50년간 1500회 이상 공연하며 22만명이 넘는 관객들을 만나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고, 한국 최초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를 비롯해 ‘꽃님이!꽃님이!’ ‘지붕위의 바이올린’ ‘키스 미 케이트’ ‘갬블러’ 등을 연출하는 등 뮤지컬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문화예술 공로자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임영웅 대표의 뒤를 이어 고인의 장녀인 임수진 극장장이 이 공간을 책임지고 있다. 연극을 전공하지 않은 그에게는 당연히 극장 운영에 대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임수진 대표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2012년부터 극장의 운영을 맡으면서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작품을 올려왔음에도 여전히 임수진 대표는 “한 번도 운영이 쉬웠던 적이 없다”며 “겁도 없이 시작한 일”이라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아버지는 연극에만 집중하시는 분이었어요. 좋게 말하면 온전히 저에게 맡겨주셨다고 할 수 있겠네요(웃음). 모든 일이 자기가 좋아서 할 때 잘하는 거잖아요. 잘하기 위해 제 자리에서 그저 열정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소임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 역시 그렇게 하셨고요. 무엇보다 산울림 소극장은 아버님, 어머님이 힘듦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좋은 작품을 찾아왔고 이를 무대에서 실현시켜준 스태프, 배우들이 함께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소극장이 문을 닫는 와중에 산울림이 긴 시간 동안 꾸준히 대중의 관심 속에 유지된 건, 무작정 ‘옛 것’만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간을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면서 다양한 예술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고전을 올리면서도 동시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산울림 소극장이 공간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다. 불멸의 음악가들의 삶을 그들이 남긴 편지와 라이브 음악으로 재조명하는 ‘편지콘서트’나 한국 고전 문학을 재해석한 연극을 선보이는 ‘고전극장’도 같은 맥락에서 십수년째 이어지며 관객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산울림은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찾고 있습니다. 고전으로 불릴 만한 작품을 찾는 거죠. 예컨대 지금은 산울림의 대표 레퍼토리가 된 ‘고도를 기다리며’ 역시 초연되던 1969년엔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했던 것처럼요. 산울림은 그런 작품을 찾아서 앞으로도 계속 정체성을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최근에 무대에 올린 ‘이방인’이 그런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도를 기다리며’를 잇는 새로운 산울림의 대표작이 될 거라고 자신합니다.”
임수진 대표는 ‘공간, 건물의 시간은 유한하다’면서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건물의 시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난 2020년, 개관 35주년을 기념해 열린 전시와 공연의 이름을 ‘건물의 시간’으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건물이 나이를 먹으니까 해마다 물이 새고, 고장이 나더라고요. 사실 물리적인 건축물은 유한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산울림의 시간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은 곧 울림이 되고요. 아버님이 입버릇처럼 ‘연극은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 기억들이 이 공간을 채워간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공간의 힘’이 있다는 건 배우와 스태프, 관객들이 채운 이야기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산울림 소극장이 우리 연극사에 큰 획을 그은 존재지만, 이들의 지속가능성은 불투명한 상태다. 고 임영웅 연출가로부터 시작된 산울림의 역사가 그의 자녀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지만 임수진 대표는 “자식들에게 무조건 물려받으라고 할 마음은 없다”고 말한다.
“모든 일이 그렇잖아요. 저의 아버지와 제가 그랬듯, 본인이 좋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다만 저의 집이어서가 아니라, 한 명의 시민으로서 오래된 문화공간이 없어진다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에요. 하는 데까진 해보겠지만 어려운 세상에 향후 몇 년을 예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산울림 역사의 반은 작품과 배우, 스태프들이 그리고 남은 반은 관객들이 채워주셨어요. 관객들이 같이 봐주시고, 공감해주실 때 극장의 생명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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