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관리사 이탈은 필연적" 필리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
[정창 기자]
▲ 3일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 2024.9.3 |
ⓒ 연합뉴스 |
▲ 8월 27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필리핀 가사관리사의 급여를 최저임금 아래로 낮춰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는 오세훈 서울시장 |
ⓒ 서울시 |
필리핀 가사관리사와 관련해 쏟아지는 국내외 언론 보도와 사설, 그리고 경제 정책 전문가의 주장 속 잊힌 목소리가 있다. 바로 필리핀 시민의 목소리다. 한국과 필리핀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한국에 거주한 지 10년이 넘은 필리핀인 4인의 생각을 들어봤다.
"외국인 근로자도 세금을 내는데 최저임금 차등적용은 불공평해"
▲ 필리핀 이주노동부(Department of Migrant Workers)의 서울시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채용 설명 자료 |
ⓒ 필리핀 이주노동부 |
"필리핀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면 매달 약 2만 페소(약 48만 원)가 필요한데 대부분 그만한 돈이 없어요. 취업을 위한 각종 서류를 준비하는 것도 비용이 추가로 들죠. 그래서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중개소에서 돈을 빌려요. 저 또한 그랬고요. 빌린 돈을 한국에서 일하면서 이자와 같이 갚는 거예요. 이러한 관행은 필리핀에서 매우 흔하답니다."
돈까지 빌려가며 일하려고 왔다면, 한국에서 받는 월급(150만 원~230만 원)이 충분할지 궁금했다. 그는 "숙박 비용이 들지 않는다면 최저시급도 충분하지만, 한국에서 생활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요. 필리핀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내야 해서 저축하는 건 어려워요. 빌린 돈도 갚아야 하니까요"라고 말했다.
라셀은 공장에서 받는 약 180만 원의 월급으로 세금과 자녀 학원비를 낸 뒤 나머지로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다. 자녀에게 좋은 교육을 해주고 싶지만, 학원비가 부담스러운 건 여느 부모와 다를 바 없었고, 급등하는 물가가 부담스러운 건 여느 한국인과 같았다.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최저시급 차등 적용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우리도 세금을 내고 있어요. 최저시급은 외국인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어야 해요"라고 목소리 높여 말했다.
국내 세법에 따르면 외국인이라도 한국에 주소가 있거나 183일 이상 머물 시 거주자에 해당하며 소득공제나 세액공제 등 일반적인 공제항목을 내국인과 똑같이 적용받고 동일하게 세금을 낸다.
"최저시급 보다 적게 받는다면 한국에 오지 않을 것"
광주에서 영어 강사를 하고 있는 마린(40대, 여)은 한국에 거주한 지 올해로 14년 차로, 과거 필리핀에서는 교사였다. 그는 가사관리사의 전문성과 한국의 비싼 물가를 고려했을 때 현재 서울시가 주는 월급이 충분하지는 않다고 했다.
"한국의 높은 물가와 이민생활의 리스크를 고려했을 때 서울시의 월급은 충분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전문적인 역량 대비 낮은 보수이고, 한국까지 오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돈을 빌려서 이 또한 갚아야 하니까요.
(최저임금 차등 적용 논쟁에 대해) 국제노동법에 반하는 것이니 불공평하면서 차별적이라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노동력을 착취 당하는 것 같고 전문성을 쌓는 데 투자한 것까지 고려하면 좌절감 안겨줄 것 같아요."
지난 10월초 서울시는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은 10월분 급여로 최소 154만 원을 받고, 많게는 229만 원을 받는 경우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평균 180만 원 수준은 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이는 국내 최저시급인 9860원이 적용된 수치로, 필리핀 가사관리사는 계약상 주간 최소 30시간의 근무시간을 배정받는다.
홍콩과 싱가포르와 비슷한 수준으로 최저임금을 차등적용해도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에 올 것 같으냐는 질문에 마린은 "최저시급 보다 적게 받는다면 한국에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일부는 한국을 선택하겠지만, 대부분은 월급이 높은 다른 나라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핀 가사관리사의 무단이탈 이유로 마린은 낮은 임금과 함께 다가오는 계약 만료로 인한 고용 불안정성을 꼽았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면 최대 280만 원까지 받을 수 있고 이러한 직업을 주변에서 소개해 줘서 도망쳤을 가능성이 있다"라며, "그럼에도 이번 사업은 한국 정부가 모든 필리핀 사람을 대상으로 취업의 기회를 제공한 만큼 그들의 행동이 다른 필리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고민했어야 한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일부 이탈 필연적… 계약 약 3개월 남은 현재, 다음 단계 생각할 듯"
한국 거주 12년 차이자 부산에 있는 유치원에서 일하는 라니(30대, 여)는 서울시 가사관리사의 계약기간이 7개월(교육 1개월, 근로 6개월 총 7개월 비자)이라는 점에서 일부의 무단 이탈은 필연적이었고 앞으로 추가로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짧은 계약으로 인한 고용 불안정성을 지적한 것이다.
라니는 "가사관리사가 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썼고 돈을 빌리기까지 했는데 6개월밖에 일할 수 없다면 너무 짧다고 느낄 것 같아요. 대부분이 더 오래 한국에 남아서 일하고 싶어할 거예요"라며, "계약 만료까지 약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남은 가사관리사들은 다음 단계에 대해 알아보며 고민하고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좋은 기회가 온다면 (불법체류자가 된다고 해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불법으로 한국에 거주하는 주변 필리핀 사람 중 한국에 거주한 지 10년, 12년 된 사람들도 있어요. 이들은 잡힐 때까지 고임금을 받는 직장에서 최대한 오래 일하고 싶어해요."
라니는 불법으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필리핀 사람 중 상당수가 기한이 정해진 계약을 통해 한국에 입국한 뒤 본래 직장에서 도망쳐 나와 불법으로 다른 곳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불법체류자를 채용하는 한국 기업이 많고 필리핀 커뮤니티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 사람에 대한 평판에 악영향을 끼칠까 두려워"
한국에 거주한 지 올해로 10년차인 한나(30대, 여)는 서울시의 시범사업이 필리핀 사람을 향한 부정적인 편견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했다.
한나는 "애정 많고 아이를 잘 돌본다는 점에서 자랑스럽지만, 가사관리사라는 직업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필리핀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특히 9월에 발생한 무단이탈 사건에 대해 "(필리핀 커뮤니티에서) 당시 큰 뉴스거리였고 필리핀 사람으로서 실망스럽고 부끄러웠어요. 이 사건이 많은 필리핀 사람들의 인상에 악영향을 끼칠까봐 걱정됐어요"라고 말했다.
최저임금 차등지급에 대해 "필리핀에서는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어요. 이걸 아는 사람들이 왜 월급을 최저임금 이하로 내리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4인 모두 공통으로 언급한 필리핀인을 향한 차별
인터뷰에 응한 4인 모두 공통으로 언급한 건 한국에서 필리핀인으로 살면서 경험하는 차별이었다. 마린은 필리핀에서부터 수년간 학생을 가르쳤지만, 그가 취업한 학원은 필리핀 사람인 걸 숨기고 '미국인 행세'를 하라고 요구했고, 라니는 필리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성희롱적인 발언을 종종 듣는다고 밝혔다. 한나는 영어 발음 때문에, 라셀은 외국인이어서 차별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한나는 "필리핀 사람들은 '아메리칸 드림' 대신 '코리안 드림'을 꿈꿀 정도로 한국 문화를 좋아해요. 필리핀 사람들이 공평한 처우를 받고, 함께 할 수 있는 문화가 생기길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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