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만 못한 서래마을,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경신원 기자]
내가 가장 존경하는 도시학자인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 1916-2006)는 전통적인 도시계획 관련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도시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기존의 도시계획 전문가들의 시각을 뛰어넘는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1961년 출간된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은 기존의 도시 개발 방식을 비판하며, 사람 중심의 도시계획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녀는 도시를 단순히 건물이나 도로 같은 물리적 요소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거주민들의 다양한 활동과 커뮤니티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복잡한 시스템으로 바라보았다.
활기차고 매력적인 도시를 조성하기 위해 제인 제이콥스가 강조한 요소들은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그녀가 제안한 네 가지 핵심 요소를 살펴보자.
1. 혼합용도 개발(mixed-use development): 주거, 상업, 문화시설 등 다양한 기능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을 조성하여, 하루 종일 활기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2. 짧은 블록과 보행 친화적인 거리: 사람들의 빈번한 왕래를 유도하여 자연스럽게 교류와 소통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보행자 중심의 거리 설계
3. 거리의 눈(eyes on the streets): 지역주민과 상인들의 눈을 통해 자연스럽게 거리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는 구조
4. 다양한 스타일과 용도의 건물들의 혼합: 다양한 사람들이 접근 가능한 주거 및 상업 환경의 조성으로 사회적 다양성과 포용성을 증진하는 것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인 제이콥스가 강조한 요소들은 어린시절 내가 살았던 서울 강북의 동네에서 종종 발견되는 것들이다. 1970년대 초, 체계적인 도시개발을 위해 미국식 조닝 시스템(Zoning system)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서울의 도심지역은 그녀가 중시한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조닝 시스템은 토지의 용도를 주거, 상업, 교육, 업무 지구 등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각 용도에 맞는 개발만을 허용하는 방식이다. 도시의 효율적인 개발을 위해 도입되었지만, 각 구역의 용도가 지나치게 획일화되어, 혼합용도 개발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강남의 반듯하게 정렬된 격자형 도로보다, 강북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전통적인 조닝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유연한 도시계획과 개발 모델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제인 제이콥스의 이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한국의 '프랑스 마을'로 알려진 서래마을은 조닝 시스템에 의해 개발된 강남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역이다. 강남에 위치하면서도 전형적인 강남의 모습과는 다르게, 제인 제이콥스가 강조한 요소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매력적인 곳이다.
▲ 서래마을 주요상권도로 모습 |
ⓒ 경신원 |
서래마을에서 8년째 거주하고 있는 A씨(여, 40대, 주부)는 서래마을에 거주하는 가장 큰 장점으로 마을내에서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꼽았다.
"저는 이곳에서 모든 걸 해결해요. 사실 다른 지역에 갈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해요. 예전엔 병원이랑 마트가 부족해서 좀 불편했었는데, 지금은 필요한 대부분의 편의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어요. 저는 운전을 하지 않아서 서래마을처럼 걸어서 생활할 수 있는 동네에 사는 게 정말 좋아요."
과거에는 대형빌라나 주택들이 많았지만, 점차 소형 평형의 빌라나 다세대, 다가구 주택들의 개발이 이루어져 다양한 사회적 계층이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인들 뿐만 아니라 여러 국적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지역 주민들과 방문객이 혼재되어 마을의 개성과 활기를 더해주고 있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B씨(여, 50대, 컨설턴트 대표)는 2010년 귀국한 이후 줄곧 서래마을에 살고 있다.
"서래마을엔 정말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이 많아요. 한국에 살지만, 외국에 있는 느낌? 외국인들도 많지만, 저처럼 해외 경험을 하신 분들이 정말 많아요. 동네를 걸어 다니다 보면 멋쟁이들도 많고, 다들 개성이 강해서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요. 어떤 분들은 서래마을이 갖고 있던 '부촌' 이미지가 많이 사라졌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오히려 다양한 계층들이 함께 거주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해요. 그게 건강한 사회 아닐까요? 너무 한 계층에만 치중된 지역은 오히려 고립되고 위험하죠."
지역민들과 상점주인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서래마을에 거주하거나 상업활동을 해오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거리의 안전과 질서를 지키는 '거리의 눈' 역할을 하고 있다.
2019년부터 헬스장을 운영하고 있는 C씨(남, 30대)는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 줄곧 서래마을에 살았다. 결혼 후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를 했지만, 부모님이나 다른 형제들이 거주하고 있는 서래마을로 다시 돌아올 계획이다.
"서래마을에 거주하는 분들은 투자보다는 거주목적으로 사시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오래된 식당이나 가게들도 많구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어요.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단골손님이 꽤 많은 곳이죠. 이곳이 워낙 '올드머니'가 있는, 어느 정도 소비능력이 되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상점분들은 외부인들 보다는 거주자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하시죠. 그런데 한 5년 전부터 상권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오랫동안 이곳을 지키던 분들이 나가기 시작했어요. 새로 들어오신 분들은 아무래도 동네 분위기를 잘 모르시다 보니까… 전에 없던 소소한 다툼도 있고요. 주차문제나 뭐 이런 것들… 좀 안타까운 부분이 있죠."
'프랑스 마을'이라고 해서 찾아와 봤는데…
서래마을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다소 의외였다. '프랑스의 작고 예쁜 마을'을 상상하며 고속터미널역에서 서래마을로 가는 유일한 버스 노선인 13번 마을버스를 탔지만, 프랑스 학교와 외국인들, 그리고 프랑스어로 된 이정표를 제외하면 '프랑스 마을'이라는 로컬 브랜드에 맞는 거리풍경은 아니었다. 다만 강남의 다른 지역과 달리 아파트가 거의 없다는 점은 눈에 띄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서래마을 주요 상권거리에서 안경점을 운영하고 있는 D씨(여, 50대)는 서래마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서래마을이 프랑스마을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이었던 것 같아요. 언론매체에서 이곳을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프렌치 느낌이 나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가게들이 많았죠. 서래마을 입구부터 예전 함지박이 있던 곳까지 쭈욱 있었어요. 거리가 젊은 친구들로 활기가 넘쳤어요. 지금은 거리가 조용해요. 코로나19 이전부터 상권이 정체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사실 이곳이 성수동이나 한남동처럼 상권이 확 뜬다거나 하지는 않거든요. 그래도 꽤 안정적으로 유지가 되는 곳이거든요. 그런데 서래마을에 있던 꽤 유명했던 레스토랑들이 코로나19 이전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하더라고요. 1층에 빈 상가들도 생기고요. 코로나가 끝나고는 좀 나아졌었는데, 요즘 또 어려워지기 시작했어요. 새로 유입되는 인구가 거의 없어요."
▲ 생활밀접업종 개폐업수(2022~2024) |
ⓒ 서울시 상궝분석 서비스 |
▲ 생활밀접업종 평균임대료(2022-2024) |
ⓒ 서울시 상권분석 서비스 |
▲ 중대형 상가 공실률(2022-2024) |
ⓒ 한국부동산원 |
▲ 생활밀접업종 연차별 생존율(2022-2024) |
ⓒ 서울시 상권분석 서비스 |
"제가 워낙 특이한 스타일을 좋아하다 보니, 서래마을에는 저와 유사한 취향을 가진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 서래마을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고 있어요. 프렌차이즈도 좀 늘고요. 예전엔 서래마을에만 있는 독특한 상점들이 있었거든요.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그런 곳들이 많이 사라지고 좀 평범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재미가 없어졌죠. 저는 서래마을의 특성을 살려서 메인 하이스트리트(주요 상권도로)를 좀 예쁘게 꾸몄으면 좋겠어요. 유럽이나 미국에서 보이는 거리처럼 간판이라도 통일을 하면 좀 더 고급스러워지지 않을까요?"
주요 상권도로의 가로 경관이나 디자인에 대한 불만족은 지역 주민들이나 다른 상인들도 공통적으로 지적한 사항이다. 신반포에 있는 아파트에 살다가 2000년대 후반, 서래마을로 이사한 F씨(여, 50대, 직장인)는 이렇게 말했다.
"서래마을 상권이 주춤한 건 코로나 이전부터였어요. 오랫동안 브런치 카페로 유명했던 곳이 갑자기 빠져 나가고 난 뒤로는 서래마을에서 꽤 잘나가던 샵들이 하나 둘 없어 지더라고요. 그러더니 이전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상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제가 이런 상점이나 식당들이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예요. 그래도 서래마을 메인 도로인데, 간판이나 인테리어를 다른 상점들과 좀 조화롭게 하면 좋잖아요. 그런데 본인 가게만 눈에 띄게 하려고 하니까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게 해요. 동네가 예뻐야 사람들도 찾아오고 상권도 살고 하는 거 아닌가요?"
정체하는 로컬 상권,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서래마을의 상권변화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났던 삼청동길, 가로수길, 그리고 '~리단길'의 원조인 경리단길과는 다르다. 서울 강북지역이나 비수도권지역의 저층 주거지에 형성된 오래된 상권은 서래마을처럼 배후 주거지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소비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유입인구가 부족하거나 배후 주거지의 인구 구조 변화로 인해 상권이 정체되거나 쇠퇴하는 경우가 많다.
정체되거나 쇠퇴한 상권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보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상권 기획자'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상권 기획자라는 개념은 1950~1960년대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주요 도시에서 전통적인 상권 모델을 넘어서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해지면서 등장했다.
상권 기획자와 함께 설립된 조직이 '비즈니스 활성화 기구(Business Improvement District, BID)'이다. 1970년대 재정 위기와 범죄 증가로 인해 뉴욕시의 많은 상권이 침체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뉴욕시와 상인들이 협력하여 BID를 설립했다. BID는 상권 기획자가 중심이 되어 운영되며, 가로경관 개선, 간판 정비, 거리 청결 유지, 보안 강화, 공공 예술 프로젝트 및 다양한 이벤트 개최 등을 통해 뉴욕의 상권을 활기차게 변화시켰다. 특히 BID의 역할은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더욱 확대되었다. 맨해튼이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상인들과 부동산 소유주들이 자발적으로 기존의 BID를 확장하거나 새로운 BID를 설립하여 지역 경제 회복을 적극 지원했다.
BID는 지역 상권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설립된 공공-민간 협력 모델이다. 지역의 상인과 부동산 소유주들이 자발적으로 자금을 조성하여 운영되며, 뉴욕시의 승인 아래 설립되고 특정 구역내에서 활동한다. 지속적인 재정지원을 위해 조세 형식의 특별 부과금을 통해 안정적인 운영자금을 확보한다. BID의 주요 역할은 다음 세 가지이다.
1. 상권 활성화와 마케팅: 지역 축제, 이벤트, SNS, 광고 캠페인을 통해 상권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유동인구 증가를 유도한다.
2. 환경 및 인프라 개선: 거리 청소, 쓰레기 수거, 가로경관, 보행자 친화적인 거리설계, 조명개선, 조경 관리 등을 통해 쾌적한 거리 환경을 유지하고 사설 보안 요원의 배치와 CCTV 설치 등을 통해 안전한 쇼핑환경을 제공한다.
3. 상인 및 주민 지원: 소상공인을 위한 비즈니스 컨설팅, 경영 교육 등을 제공하여 상권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임대인과 임차인이 상생할 수 있는 협력방안을 모색하고, 커뮤니티 이벤트 및 공공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제인 제이콥스가 실제로 거주하고 그녀의 도시 이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그리니치 빌리지에도 1990년대 초반 그리니치 빌리지 비즈니스 활성화 기구(Greenwich Village Business Improvement District, GV BID)가 설립되어, 지역의 상업 활동과 주민들의 생활의 질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뉴욕시 맨해튼의 서부에 위치한 그리니치 빌리지는 좁고 아기자기한 골목을 중심으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상점들이 조화를 이루며, 지역 고유의 문화를 반영하는 상권이 형성되었다. GV BID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상권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위해 소규모 창업지원, 지역 브랜드 강화, 거리 경관의 미적 개선 등이 이루어졌다.
BID를 도입하여 서래마을의 상권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방안을 살펴보자. 서래마을은 프랑스의 이국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상권으로, 이러한 문화적인 정체성을 강조하는 상권 활성화 방안이 필요하다.
1. 디자인 가이드라인: 서래마을 내 카페, 레스토랑, 상점들이 '프랑스 마을'이라는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도록 간판, 디자인, 건물의 외관, 내부 인테리어에서 프랑스의 이국적인 요소를 강조하도록 해야 한다.
2. 개성있는 상권유지: 소규모 독립 상점들이 중심이 되는 상권을 유지하고, 이들이 문화적인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개성있는 상점을 유치하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3. 로컬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벤트: 서래마을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버스킹, 플리마켓, 크리스마스 마켓 등의 이벤트를 추진하여 지역주민과 외부인들이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하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4. 주민참여와 지역 커뮤니티 협력: 서래마을 상권활성화를 위해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상인과 부동산 소유주 간 협력이 이루어 지도록 해야 한다. 지역 주민과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상권을 발전시키고 문화적 활동을 함께 만들어 나가도록 한다.
서울시는 2022년부터 쇠퇴한 로컬 상권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로컬 브랜드 상권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 사업은 상권 기획자가 지역 상인과 주민과 협력하여 상권의 현황을 분석하고, 지역 특성에 맞는 상권 환경개선, 상인 역량 강화교육, 문화 행사 개최 등의 맞춤형 지원을 통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사업은 주로 쇠퇴한 상권지역에 집중되고 있어, 서래마을처럼 정체된 상권지역을 살리기 위한 지역 커뮤니티의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로컬상권이 쇠퇴한 경우에는 정부주도의 상권 활성화 사업이 필요하지만, 서래마을처럼 안정적이지만 정체상태에 있는 상권의 경우에는 지역 상인과 부동산 소유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민간주도의 상권 활성화 기구가 운영되도록 세금 혜택 등의 지원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살린 독창적인 상권을 조성하여, 더욱 매력적인 도시로 발전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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