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책과 길] 글로벌 경제·정치 패권 다툼, 그 실상 해부한다
헨리 패럴·에이브러햄 뉴먼 지음, 박해진 옮김
파도북스, 352쪽, 2만5500원
제국은 망했지만 로마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로마와 점령지를 잇는 8만5000㎞의 도로는 로마의 상징이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현대 제국의 길은 한 곳을 향한다. 바로 미국이다. 초고속 인터넷망과 금융 네트워크, 반도체 공급망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장악해 ‘지하 제국’(언더그라운드 엠파이어)를 건설한 미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통해 세상을 통제하고 있다. 국제정치학자인 두 저자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믿었던 인터넷과 금융시스템과 같은 글로벌 인프라를 미국이 어떻게 통제하고 있는지를 폭로하면서 세계 정치경제의 실상을 파헤친다.
로마의 길이 상인들의 교역로에서 시작한 것처럼 글로벌 네트워크는 정치적 지배를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효율성과 수익을 추구하는 민간 기업들이 개척한 길이였다. 정치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인터넷은 근본적으로 중앙 통제를 피하기 위해 고안됐다. 다만 인터넷의 기반인 물리적 네트워크(초고속 통신망)는 한 곳에 집중돼 있다. 바로 미국 버지니아 북부의 애쉬번이다. 이곳에는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데이터센터도 밀집해 있다. 모든 정보가 모이는 것이다. 미 국가안보국 추정에 따르면 2002년 무렵 이미 전 세계 인터넷 통신 중 미국을 거치지 않고 세계의 두 지역을 오간 비율은 1% 미만이었다.
전 세계 금융 네트워크도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은행 간 금융거래와 지불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는 벨기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이사회는 미국 은행들이 장악하고 있고 데이터센터도 미국에 있다. 또한 국제 은행들은 미국 달러로 거래하면서 미국 규제기관이 제어하는 ‘달러화 결제 시스템’에 몸을 맡기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최상단은 미국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반도체 회사 한 곳과 협력하는 전 세계 공급업체만 1만6000개에 이른다. 퀄컴 같은 가장 정교한 반도체 설계가 가능한 기업들은 미국에 있고, 첨단 반도체 설계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는 모두 미국 기업의 독점 자산이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우연히’ 중앙의 힘을 발견했다. 미국 감시 기관은 한 나라 전체의 전화 통화를 한 건씩 녹음하고 최대 1개월간 데이터를 저장해 나중에 의심되는 개인의 통화 내용을 다시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미국 시스템을 거쳐 가는 관심 대상으로 표시해 둔 이름이나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가 언급된 이메일을 수집할 수도 있다. 또한 SWIFT를 통해 전 세계 금융 거래 정보를 파악할 수 있고, 특정 기업이나 개인, 나라 전체를 국제 금융 시장에서 배제할 힘을 확인했다. 실제 미국은 이란 은행에 대한 SWIFT 차단 조치를 통해 핵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미국이 지배하는 제국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중국이었다. 통신 장비와 반도체를 생산하는 화웨이가 공격의 첨병에 섰다. 화웨이는 “시골을 점령해 도시를 포위한다”는 마오쩌둥식 전략을 기반으로 경쟁사들이 무시하던 농촌 지역을 파고든 뒤 대도시로 사업을 확장했다. 중국을 지배하던 상하이벨, 쥐룽을 비롯해 미국의 루슨트는 쓰러지거나, 인수되거나, 중국 시장에서 퇴출됐다. 중국을 장악한 화웨이는 국제무대로 눈을 돌렸다. 이때도 세계적 통신기업들이 도외시했던 동남아, 남미, 아프리카 시장을 겨냥했다. 그리고 서서히 세계 경제의 중심부로 향했다.
미국은 중국이 화웨이를 앞세워 중국 중심의 네트워크 제국을 건설해 자신을 위협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미국은 선제공격에 나섰다. 우선 동맹국들에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직접적인 제재에 착수했다. 2019년 미 상무부는 화웨이 본사와 계열사를 수출통제 명단에 올렸다. 화웨이는 미국 정부의 허가 없이 첨단 반도체를 구입할 수가 없었다. 지적 재산의 25% 이상이 미국에 속한다면 외국 제품의 수출을 차단할 수 있다는 미 상무부의 규정이 근거가 됐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는 미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중국 기업에 공급하던 인공지능(AI) 반도체 생산을 중단하기도 했다. 저자들은 “(화웨이는)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의 기술적 야망의 중심에 있었지만 이제는 중국의 약점을 경고하는 대표 사례가 됐다”면서 “미국은 글로벌 통신과 금융, 기술 유통 채널을 틀어쥐고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마저도 인질로 붙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압박이 커질수록 중국은 물론 동맹국과 기업들의 저항도 커질 수밖에 없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긴밀한 경제적 유대와 상호의존이 안전성과 안보를 촉진한다”는 글로벌 시장주의에 대한 믿음이 “이제는 무너졌다”고 우려했다. 헤르베르트 디스 폭스바겐 최고경영자는 “중국에는 폭스바겐이 필요 없을지 몰라도, 폭스바겐에는 중국 시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저자들은 1, 2차 세계대전 사이 제재와 경제 봉쇄정책의 역사를 재조명한 역사서 ‘경제 무기’를 인용해, “독일과 일본은 경제 봉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른 수단을 통해 자국을 보호하려고 했고, 그 결과 세계 전쟁이 일어나고 수천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영향력이 향하는 방향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미국은 탄소 집약적 수입 품목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고, 탈세와 부패를 국가안보의 핵심 관심사로 두고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디지털로 세계화된 세상에 미국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국제 정치의 본질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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