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美 대선 좌우한 경제… 통계와 체감의 괴리
“미국 경제 나쁘다” 유권자 인식
인플레 ‘가격표 쇼크’서 비롯
성장률도, 실업률도 아닌
마트의 달걀·버터 값이
세계질서 뿌리째 뒤흔든 셈
트럼프의 물가 처방 틀렸지만
거시지표에 가려져 있던
대중이 가장 예민한 대목을
어쨌든 짚어냈기에 당선됐다
폴 크루그먼은 지난 4년간 뉴욕타임스에 미국 경제를 진단하며 글을 써왔다. 노벨상을 받은 이 경제학자는 일관되게 “미국 경제가 좋다”고 했다. 좋아도 너무 좋다면서 각종 통계를 동원해 바이드노믹스의 성과를 평가했다. 물가가 치솟을 때는 임금상승률이 더 가파르다는 수치를 제시했고, 불황 전망이 나올 때는 어떤 통계에도 조짐이 없다는 분석을 내놨다. 대선이 임박한 10월의 칼럼 제목은 ‘경제의 모든 굿뉴스가 바이드노믹스의 정당성을 입증한다’였다.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27일 ‘카멀라 해리스 도와주는 눈부신 미국 경제’란 기사를 실었다. “미국이 이렇게 좋은 경제 환경에서 대선을 치를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면서 3%에 육박하는 성장률, 안정된 인플레이션, 불어난 소득, 꺾이지 않는 소비, 그럼에도 견고한 저축률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을 조합한 고통지수가 2020년(트럼프 1기 마지막 해) 15에서 현재 6.5로 낮아진 점을 들었고, 이코노미스트의 선거 예측 모델에 활용되는 5가지 경제지표가 모두 눈부셔서 해리스에게 유리하다고 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와 권위 있는 경제전문지의 분석에 미국인은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경제가 전부였던 선거’라 할 만큼 표심을 좌우한 이슈로 경제를 꼽은 이가 월등히 많았는데, 그들의 체감 경제는 전문가의 통계 경제와 180도 달랐다. 출구조사 응답자 3분의 2는 “미국 경제가 나쁘다” 했고, 그런 이들의 70%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줬다. 왜 그리 생각했는지, 미국 언론이 찾아가 물어본 유권자들에게서 “가스라이팅”이란 말이 여러 번 나왔다.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저들은 자꾸 경제가 좋다고 하더라.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듯했다.”
유권자들이 “경제가 나쁘다”고 가리킨 곳, 놀랍도록 일치한 그 지점은 가격표였다. 팬데믹 여파에 바이든 정부의 물가는 급격히 치솟았다. 집값은 47%, 렌트는 20%, 모기지 금리는 배 이상 뛰었다. 이런 것보다 사람들이 더 민감하게 반응한 건 달걀, 마가린, 땅콩버터, 크래커 등 매일 사는 식료품값이었다. 한번 오른 가격은 잘 내려가지 않기에 2달러에서 7달러로 뛴 달걀(10개) 값은 지금도 여전하다. 인플레이션이 안정됐다지만 일상의 ‘가격표 쇼크’는 진행형이었고, 못지않게 임금이 올랐다지만 그 충격은 줄어들지 않았다.
성장률도, 실업률도 아닌 달걀과 버터 값에 세계질서가 뒤바뀌는 상황을 경제전문가들은 예측하지 못했다. 인플레이션은 경제학을 넘어 심리학에 근접한 영역이었다. 로버트 실러의 논문 ‘사람들은 왜 인플레이션을 싫어하는가?’(1996년) 이후 거듭된 연구에서 인플레이션의 고통을 남 탓이라 여기는 대중의 경향이 확인됐다. 인플레이션과 임금 상승은 서로를 수반하는 동전의 앞뒷면인데, 사람들은 임금 상승을 자신이 노력한 결과로 보지만 인플레이션은 누군가 잘못한 결과로 여겼고, 그 대상은 늘 정부였다. 이런 인플레이션 심리가 정치 양극화 심리(민주당 정부의 경제를 공화당원이 나쁘다고 인식하는)에 더욱 굳어지고, 확증편향의 SNS 정보 유통에 더욱 증폭됐다.
트럼프와 해리스는 모두 유권자의 분노를 득표 동력으로 삼았다. 트럼프는 경제에 대한 분노, 해리스는 트럼프에 대한 분노를. 미국인은 복수와 독재를 말하는 중범죄자 트럼프보다 달걀 값에 더 분노했다. 민주주의의 위기도 마트의 가격표만큼 중요하진 않았다.
바이든은 억울할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미국인에게 천문학적 팬데믹 지원금을 나눠준 여파였고 어느 나라보다 빨리 연착륙을 이뤘지만, 정권을 내주는 최대 실정이 돼버렸다. 해리스는 난감했을 테다. 경제가 나쁘다는 이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면 ‘설명’을 해야 하는데, 선거는 구호로 하는 것이다. “저들이 경제를 망쳤다”는 트럼프의 구호에 맞서 차트 갖고 설명할 순 없는 노릇이니 “민주주의가 위험하다”는 다른 구호에 매달려야 했다.
물가를 낮추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높은 관세 장벽 등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조장하는 상충된 공약이 즐비해 벌써 ‘트럼플레이션’ 경고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선거에선 처방의 옳고 그름보다 누가 그것을 말하느냐가 중요했다. 대중이 가장 예민한 부분을 짚어내는 이에게 민심은 움직인다. 이번엔 트럼프가 그것을 했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로제 ‘아파트’ 금지, 엄마는 기도”…외신이 본 수능날
- 쉬워진 수능, 예상 등급컷은? “국어 90~94점, 수학은…”
- 李, 김혜경 벌금형에 “항소”…본인 1심은? “그만합시다”
- 국어지문 링크에 ‘尹집회 안내’ 발칵…“누군가 도메인 구입”
- [단독] “임영웅 콘서트 사전예약”은 거짓…스미싱 주의
- 前연인 50대 남녀, 숨진채 발견…“女살해 뒤 자살한듯”
- 의대 증원 첫해 수능, ‘수학 선택과목’ 까다로웠다
- “마약 자수” 김나정, 필리핀서 귀국 후 마약 양성반응
- 수영장·가정집 다 털렸다… 중국산 IP카메라 해킹 공포
- 이란, ‘히잡 거부’ 여성 전용 정신병원 설립… “과학적 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