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실종된 국가 미래 비전

2024. 11. 15.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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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글자 그대로 격랑(激浪)의 2024년 11월이다. 이번 달 초에는 전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보던 미국 대통령 선거가 트럼프의 승리로 끝났고, 한국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에 즈음하여 대국민 사과와 기자회견을 하였다. 오늘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 1심 선고가 있는 날이고, 25일에는 다른 재판의 선고가 있을 예정이다. 게다가 북한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하여 국제 정세를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하나하나가 국정 운영과 국가 안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한 사안들이라 국민 모두가 불안에 떨며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 현안에 밀려 국가 미래 담론 사라져
AI와 양자 기술은 인류 문명 전환점
지금 대비 안 하면 영원히 뒤떨어져
희망 주기 위해서도 미래 비전 필요

이같이 여러 파도가 우리에게 밀려오고 있지만, 그 뒤에는 더욱 거대한 물결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인공지능(AI)과 양자 기술이 가져올 인류 문명의 근본적 변화이다. 인류는 18세기 말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으로 근대사회로 진입하였는데, 앞으로 인공지능이 가져올 변화는 이러한 1차 산업혁명의 영향에 못지않을 것이라고 세계 석학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당시 국가가 산업혁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뉘었는데,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가져올 사회적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될 것이다.

이처럼 중차대한 시기에는 국가의 모든 힘을 모아 대응책을 모색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국민 의견을 모아야 할 정치권은 누가 누구를 만났느니, 녹취록이 있느니 하는 일들로 매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힘을 잃은 정부는 손을 놓은 것 같다. 10년 후, 아니 5년 후 누가 이런 사소한 정쟁들을 기억할 것인가?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의 도도한 물결이나 현 국제 정세의 엄중함은 우리나라의 장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우리가 오늘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후손들이 선진국의 당당한 세계시민으로 살지, 아니면 후진국 국민의 서러움에 눈물 흘릴지 결정될 것이다.

1975년 일본의 지식인들은 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 ‘일본의 자살’이라는 글을 실어 국민과 지도층이 미래보다 눈앞의 이익만 추종하고 포퓰리즘이 성행하면 국가가 망한다고 경고하였다. 실제로 그 후 일본은 거품경제를 거쳐 점차 쇠락하였고, 한국은 부지런히 따라잡아 이제 많은 부문에서 일본과 대등하거나 앞선 실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이 그 글에서 경고한 상황과 비슷하다. 미래 비전이 없고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과거 한국이 고속 성장할 때에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 선진국으로 발전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비록 순서나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장기적인 목표에는 대다수 국민이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한국에서 미래 담론이 사라져갔다. 정부 부처부터 미래 기획을 담당했던 경제기획원이 기획재정부로 통합되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은 현안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은 현안 대응에서도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북한군 파병으로 갑자기 우리 외교·안보의 핵심 변수가 되어버린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대응도 우리나라가 지향하는 바가 민주 가치의 수호인지 아니면 경제적인 이해가 최우선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물론 매일 사생결단식 정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미래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뜬금없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안에 대해서는 당장의 이해관계 때문에 합의를 이루기 어렵더라도, 장기적 미래 비전에 대해서는 오히려 대승적 합의가 가능할 수 있다. 또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정치인과 국민들의 시야를 장기적으로 넓혀주는 효과가 있다. 물론 가장 절실한 이유는 기술 발전의 도도한 물결과 현재의 국제 상황을 볼 때, 미래에 대한 고민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라는 사실이다.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이 있으면 보통 사람들은 급한 일을 먼저 하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정치권이나 언론이 미래 담론에 대해서 미온적인 점이 이해는 된다. 그러나 국가는 오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미래를 위해 중요한 의제는 다루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여러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세계 최하위권이다. 해마다 소득은 높아져도 국민 행복지수는 오히려 거꾸로 간다. 자살률은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고,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N포 세대’라고 부르며 자조하고 있다. 우리가 과거 못 살 때보다 오히려 불행하게 느끼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어렵더라도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으면 견딜 수 있는데, 미래가 현재보다 암울하게 보이면 불행하게 느낀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국가와 민족의 미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국가 장기 미래 비전이 필요한 이유이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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