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벼슬 멀리한 장인, 연암이 과거 포기하자 오히려 기뻐해
연암 박지원의 청빈했던 친·인척
연암 손자 박규수 개화파 정치가
문학가이자 사상가로 큰 이름을 얻은 박지원(1737~1805)이지만 일흔에 이르는 긴 삶의 여정과 그 면모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가 없는 것 같다. 그의 아들 박종채(1780~1835)가 아버지의 위대함을 일상에서 건져냈다면, 그의 손자 박규수(1807~1877)는 우의정을 지낸 개화파 정치가로 조부의 사상을 계승하여 현실 정치에 접목시켰다. 이해(利害)를 따지기보다 의리(義理)를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자기 수양에 철저했던 연암의 삶이 자손을 움직인 것이다. 박종채는 아버지 연암에 대한 기억과 그 가르침을 『과정록(過庭錄)』에 담았다. 과정이란 『논어』에 나오는데, 공자가 뜰을 지나는 아들을 불러 가르침을 준 것에서 가정 교육을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 연암에 대한 폭넓은 정보가 담긴 이 책을 통해 인간 박지원의 풍미를 맛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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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헌 조부 별세 때 재산 열냥 안돼
연암 금강산 유람, 종 없어 못 갈 뻔
“뽕나무 1000그루 심겠다” 약속에
투병 형수 벌떡 일어나 “내 오랜 뜻”
“어머니는 가난을 견디는 군자”
아들, 가정교육서 『과정록』서 추모
」
박지원은 영조 13년 서울 야동(冶洞, 서소문 밖에 위치)에서 박사유와 함평 이씨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박필균이 경기 관찰사를 비롯해 참판과 대사헌 등 고위직에 있었지만, “청빈(淸貧)이 뼛속까지 스며 별세하던 날에 집안에는 단 열 냥의 재산도 없었다”고 한다. 효도 외에는 내세울 게 없었던 아버지 박사유는 아들이 벗들과 함께 금강산 유람을 떠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아버지는 “명산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거늘 젊을 적에 한 번 다녀오는 게 좋겠다”고 하지만 노자가 없었다. 그때 마침 곁에 있던 지인이 듣고 돌아가 나귀 살 돈 100냥을 보내면서 이 돈이면 유람을 떠날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돈은 되지만 데리고 갈 하인이 없었다. 이에 어린 여종이 골목에 나가 “우리 집 작은 서방님 이불 짐과 책상자를 지고 금강산에 따라갈 사람 없나요?”라고 소리쳤다. 응하는 사람이 몇이 나와 새벽에 출발하여 다락원(의정부 근처)에서 먼저 떠난 두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유람의 기록으로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叢石亭觀日出)’라는 제목의 7언 70행의 장편 고시(古詩)가 남았다.
“아버지 생각 날 때 형님 수염 쳐다봐”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여읜 서른의 박지원은 형과 형수를 부모처럼 섬겼다. 박지원이 세 살 무렵 16살의 나이로 시집온 형수 이씨(1724~1778)는 어린 시동생을 길러 주었다. 박지원은 개성을 유람하다가 연암골을 발견하고 몇 차례 오간 후 아예 온 가족을 이끌고 이거를 단행한다. 연암골은 개성에서 30리 길의 두메산골로 자호(自號) 연암은 여기서 유래하는데, 그의 나이 42세 때의 일이다. 이사한 그해 형수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힘을 다해 열 식구를 먹여 살렸으며 제사 받들고 손님 접대하는 데서도 명문대가의 체면이 손상될까 준비하고 변통하기를 거의 20년, 애가 타고 뼛골이 빠졌다.” 평소에 박지원은 형수에게 이런 약속을 해왔다.
“담장에는 빙 둘러 뽕나무 1000그루를 심고, 집 뒤에는 밤나무 1000그루를 심고, 문 앞에는 배나무 1000그루를 접붙이고, 시내의 위와 아래로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1000그루를 심고, 세 이랑 되는 연못에는 한 말의 치어(稚魚)를 뿌리고, 바위 비탈에는 벌통 100개를 놓고, 울타리 사이에는 세 마리의 소를 매어 놓고서, 아내는 길쌈하고 형수님은 여종더러 들기름 짜게 해서, 밤에 이 시동생이 옛사람의 글을 읽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시 병이 심해 누워있던 형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웃으며 “이는 바로 나의 오랜 뜻이었소!” 하였다.(‘형수 이씨 묘지명’) 이로부터 9년 후 형 박희원이 죽자 연암골에 잠든 형수 곁에 모신다. 형은 아들 셋을 낳았지만 다 잃었고 박지원의 장남을 양자로 들인 것이다. 형을 생각하며 쓴 시는 이덕무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날 때마다 우리 형님 쳐다봤지.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 두건 쓰고 도포 입고 가서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연암에서 형을 생각하며(燕岩憶先兄)’)
연암 박지원의 성취에서 처가 가족들의 역할을 들지 않을 수 없다. 16살에 처사 이보천의 집안에 장가들면서 장인에게 『맹자』를 배우고 처숙(妻叔) 이양천에게 사마천의 글을 배우며 문장 짓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장인은 사위 박지원을 애지중지 가르치며 옛사람이 이룬 바와 같은 성취를 기대했다. 다만 “악을 지나치게 미워하고 뛰어난 기상이 너무 드러나는 게 걱정”이라고 했다. 이는 “박지원은 의론이 준엄하고 과격해 권세가의 비위를 거스르는 내용이 많다”는 벗들의 충고와도 통한다. 그래서인지 장인은 그 아들 이재성에게 “지원이 회시(會試)를 보았다고 하여 그다지 기쁘지 않았는데 시험지를 내지 않았다고 하니 몹시 기쁘구나”라고 하였다. 즉 사마시 초시에서 장원급제한 박지원은 주위 사람들이 부추기는 바람에 회시 시험장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과거에 뜻이 없었던 그는 시험지에 그림만 그리다 나온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팔도는 곡식으로 살아가지만 서울에서는 돈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있는 만큼 재지(在地) 기반이 없던 서울의 양반은 벼슬 의존도가 높았다. 그럼에도 지위나 직책 보기를 돌같이 한 장인 이보천이야말로 연암이라는 보석을 제대로 알아본 것이다. 박지원은 장인의 은혜를 평생을 두고 갚고자 한다. “공의 모습 빼닮은 아들 한 분 두셨으니, 즐겁거나 슬프거나 함께 손잡고 서로 책선(責善)하고 화기애애하여, 알아주신 은혜 보답 잊지 않으리.”(‘처사이공제문(處士李公祭文)’) 공(公)의 아들이란 처남 이재성을 말한다. 이재성에 의하면,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더디면서 암기력도 약한 연암은 느리지만 철저하게 텍스트를 익혀 완벽하게 장악하는 쪽이었다. 연암은 한 편의 글이 완성될 때마다 반드시 처남에게 보이며 “나를 위해 비평을 좀 해주게!”라고 하였고, 이재성 또한 글이 완성되면 연암에게 보여 평가를 받고자 했다. “두 분은 반평생을 한 집에 거처하며 친구처럼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냈는데, 아버지의 글을 제대로 논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안 사람은 외삼촌 한 분뿐이었다.”(『과정록』)
아내 사별 후 18년간 홀로 살다 떠나
연암은 51세(1787년) 때 부인 전주 이씨의 죽음을 맞는다. 박지원의 집안은 사대부 가의 명성과 달리 경제적으로 배우 빈곤하여 3대가 한집에 살았다. 혼인을 하고도 부인 이씨는 거처할 곳이 없어 친정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가난을 견디며 독서하는 군자 같았다.”(『과정록』) 한번은 연암이 아내의 의복이 너무 낡은 것이 마음에 걸려 쓰고 남은 돈 스무 냥을 보자기에 싸서 주었는데, 아내는 도리어 “집안 살림을 책임진 형님은 늘 가난하고 쪼들리십니다. 이 돈을 왜 저한테 주십니까”라고 했다. 아내의 말에 몹시 부끄러웠다며 마음에 담아두었다. 형수와 아내는 우애가 깊었다. 형수의 아버지 이동필은 딸 집에 곡식을 보내며 그 동서까지 챙기곤 했다. 연암의 진가를 알아차린 정조 임금은 벼슬을 주며 불러내는데, 음직으로 벼슬길에 든 지 반년도 채 못되어 아내는 세상을 떴다. 아내를 애도하는 연암의 시 20편은 안타깝게도 소실되었다고 한다. 안의 현감, 면천 군수등 외직 생활에 끼니를 챙겨 줄 사람이 없어 사람들은 소실을 얻으라고 했지만 연암은 농담으로 대꾸할 뿐 종신토록 재혼은 물론 첩을 두지 않았다. 18년을 홀로 살다 떠난 연암, 이익을 멀리하고 의리를 추구한 마지막 실천이 아닐까.
연암은 타고난 성품이 호방하고 고매했으며 명예와 이익이 몸을 더럽힐까 봐 극도로 경계하고 삼갔다. 만년의 병상에는 “인순고식(因循姑息) 구차미봉(苟且彌封)”이라는 문구의 병풍을 쳐놓고 자기 수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즉 눈앞의 편안함을 좇아서 임시변통으로 땜질하는 태도를 경계한 것이다. 재물과 권력에의 탐욕이 온 국민을 조롱하는 이 세태에서 연암 같은 인물은 없는지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찾아 나서고 싶은 심정이다.
이숙인 동양철학자·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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