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의 한반도평화워치] ‘한·일 화해 재단’ 설립해 한·일 공조의 새로운 틀 만들자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가 지난 11일 연임에 성공했다. 지난달 1일 102대 총리가 됐지만 낮은 지지율 때문에 집권 한 달 만에 중의원을 해산하고 특별 국회를 열어 총리 지명 선거를 다시 실시한 것이다. 평소 한국에 우호적인 생각과 견해를 밝혀온 이시바 자민당 총재가 총리에 오르자 한국에서는 전임인 기시다 후미오 총리 때보다 더 진전된 한·일 관계를 기대한 게 사실이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제3자 변제가 재원 부족으로 인해 정체하는 상황에서 이시바의 사죄 표명과 일본 피고 기업의 기금 참여가 돌파구로 여겨졌다.
그러나 일본 기업의 재원 조성 참여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끝난 문제고, 일본이 미래 세대를 위해 더 이상 사과하지 않는다는 아베 전 총리의 ‘유훈’이 일본인의 마음과 뇌리에 있는 만큼 이시바도 쉽게 한국에 호응하는 행보를 취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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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 국교정상화 60주년 맞아
역사 화해 위한 포괄적 틀 필요
제3자 변제 재원으로 활용 가능
양국 정부·기업·개인 참여 기대
」
한·일 공조는 양국 명운 걸린 명제
이시바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지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11일 열린 특별국회에서 가까스로 총리직을 유지하긴 했지만, 당분간 국내 정치에 치중하며 지지율에 신경 써야 하는 입장이다. ‘섣불리’ 한·일 관계 진전에 적극 나서기 어려운 처지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 미국의 리더십이 교체되는 조건은 이시바 정권의 명운을 좌우할 만큼 큰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위대한 미국’(Great America)을 재현하기 위해 미국 중심주의를 내건 트럼트 당선인의 압박을 마주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 등 동북아 안보 위협은 한·일 양국 모두에게 떨어진 발등의 불이다. 북한은 러시아에 밀착하는 수준을 넘어 자국의 병력을 러시아에 파병하며 기존 안보 질서의 틀을 흔들고 있다. 한·일 양국 공조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고, 과거사에 발목이 잡혀 있을 여유가 없다. 앞으로 제3자 변제의 재원 문제를 해소하고 한·일 관계를 한 차원 도약시키는 것은 ‘실행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 아닌, 반드시 실행해야 할 ‘당위 명제’가 된 것이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3자 변제와 관련해 한국이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길이다. 제3자 변제를 위한 재원을 국가 재정으로 충당하거나 청구권 협정으로 수혜를 입은 한국 기업이 제공하는 방식이다. 국가 재정으로 충당하는 문제는 민관 협의회에서도 다뤘던 사안으로 당시에는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대한 기대가 있었고 국내 반발도 감안해야 했기에 채택되지 않았다. 반면 한국 기업의 참여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 제3자 변제가 공식 해법으로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 재판에서 승소한 이들에게 지급된 변제금은 모두 1965년 한·일 기본합의서 때 일본에서 들여온 자금을 투입해 설립한 포스코에서 부담했다.
3자 변제를 강하게 반대해오던 피해 생존자 양금덕 할머니와 이춘식 할아버지도 이를 수용한 만큼 한국 측만의 재원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길은 두 차례에 걸쳐 강제 징용 피해자에게 보상했던 역대 한국 정부의 방침과도 부합한다. 다만, 한국이 자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무래도 국민 정서와 거리가 있고, 향후 한·일 관계 악화의 불씨가 될 우려가 있다.
민관 협력하는 ‘문희상 안’ 참고할 만
그렇다면 일본과 함께 미래를 위한 화해의 관점에서 좀 더 바람직한 대안을 생각해 봐야 한다. 내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 되는 해다. 정부는 윤석열 정부 들어 호전된 한·일 관계에 속도를 붙이기 위해 이미 국교 정상화 60주년 준비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고, 민간에서도 양국의 교류·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나는 제3자 변제의 마무리를 포함해 한·일 역사 화해를 위한 새로운 포괄적 틀로서 ‘한·일 화해 재단’ 설립을 제안한다. 이 재단은 1965년 청구권 협정의 합의 내용을 인정하고, 1998년 한·일 파트너십 선언의 정신을 계승해 미래를 향한 화해 사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재원은 양국의 기업과 개인, 그리고 뜻을 공유하는 세계 시민들이 참여하는 ‘한·일 화해기금’으로 충당할 수 있다. 양국 정부도 기금 조성에 참여하길 기대한다. 한·일 화해를 위한 포괄적 재원으로 제3자 변제금도 여기에서 충당할 수 있다. 이는 강제 징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9년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제시했던 이른바 ‘문희상 안’의 계승 또는 변주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문희상 의장은 높아진 대한민국의 위상과 국격에 걸맞게, 한편으로는 지난날 국민이 입은 상처에 대해 책임 의식을 갖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입장을 포용해 ‘기억·화해·미래 재단’을 설립하고 양국의 기업과 개인이 자발적으로 기금에 참여한다는 법안을 발의했다.
문희상 안이 갖고 있는 획기적인 의미는 기금 모집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양국 정부와 민간이 한·일 화해라는 대의를 향해 함께 모금을 진행하는 과정 자체가 화해였던 것이다. 아쉽게도 당시엔 여야 합의를 통한 법안 제정이 무산되면서 더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만약 한·일 화해 재단 설립에 여야가 합의하지 못한다면 반민반관 형태의 재단을 설립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권력 기반이 취약한 이시바 총리가 일본 내 반발을 우려해 선뜻 친한(親韓) 정책을 펼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가 총선에서 패배한 건 한·일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했으면 한다. 총선 패배는 그가 친한 인사라는 인식보다 오히려 지난해 불거졌던 집권 자민당의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 그리고 집권 이후 평소 자신의 지론과 달라진 언행에 대한 일본 국민의 실망 때문으로 보는 게 맞다. 총선 패배는 자민당의 기존 노선과 차별화를 시도했던 그가 총리가 된 뒤 자민당식 관성에 안주하려 하자, 변화를 바라는 일본 국민들이 내린 준엄한 심판이었다. 이시바 총리가 한·일 화해 재단 설립에 협력하고, 한국과 함께 미래를 향해 나가려는 노력에 나선다면 일본 국민도 기꺼이 지지를 보낼 것이다. 미국의 리더십 교체로 불확실성이 커진 국제 정세에 한·일이 공동으로 대응하는데도 긍정적인 요소가 될 게 분명하다.
박홍규 고려대·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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