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예술] 인간을 사유하는 한국의 현대음악

2024. 11. 15. 00:2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한국에는 어떤 작곡가들이 활동하고 있을까? 연주자들의 경우, 국제 콩쿠르의 우승 소식이 뉴스에 자주 보도되면서 큰 주목을 많이 받지만, 작곡가에 대한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의 창작 음악은 긴 역사 속에서 치열한 예술정신을 구현한 많은 작곡가를 배출했고, 오늘날도 그 창작의 열기는 뜨겁다.

지난 11월 1일 막을 내린 사단법인 ‘한국작곡가협회(이사장 이경미) 창립 70주년 기념음악제’는 한국 작곡가들의 역량과 예술적 성과를 보여준 자리였다. 1954년 출범한 한국작곡가협회는 현재 24개의 작곡 동인 및 단체가 참여하며 600여 명의 작곡가가 회원으로 활동하는 단체이다. 10월 28일부터 5일간 여섯 번의 음악회로 진행된 이번 음악제에서는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 30여 편이 연주되었다.

「 작곡가협회 창립 70주년 음악제
서양 음악과 한국 정서 융합 넘어
‘인간’ 화두로 예술적 열정 펼쳐

한국작곡가협회 창립 70주년 기념음악회 예술의전당 공연. [사진 한국작곡가협회]

한국 창작계의 역사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곡계의 선구자인 홍난파(1894~1941)는 “한국에서도 바흐와 모차르트가 나와야 한다”고 하면서 새롭게 수용한 서양음악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렇지만 동시에 “서양과 일본식 스타일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 김동진(1913~2009)의 주장처럼 민족주의적 시각도 등장했다. 20세기 후반기에는 윤이상(1917~1995)이 잘 보여주었듯이, 두 경향이 융합되면서 서양식 음악에 한국적 정서와 사회를 담고자 하는 흐름이 창작 음악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

이처럼 한국의 현대음악은 한국적 전통과 정체성, 그리고 서양식 음악과 문화 사이의 상호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21세기 전후로 변화가 나타났다. 이제는 ‘한국적인 것’이냐 ‘서양적인 것’이냐를 고민하기 보다는 순수하게 음악 그 자체에 집중하였고, 그 방향은 ‘인간’을 향했다. 인간에 관한 관심, 인간의 표현, 인간에 대한 사유가 중심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음악제의 마지막 날(11월 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공연에서 잘 드러났다. 오케스트라 곡으로 구성된 이 연주회에서는 한국 작곡계의 원로 박영희, 중견 작곡가 황성호와 김진수, 그리고 젊은 혈기로 활동하고 있는 임영진, 이문희, 김지현의 작품이 연주되어 세대에 따른 음악적 흐름과 특징을 짚어볼 수 있는 자리였다.

첫 곡은 박영희의 작품이었다. 독일에서 최초로 여성 작곡가 교수가 된 박영희의 ‘여자여, 왜 울고 있습니까? 당신은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는 성경 구절에서 출발한 작품으로 슬퍼하는 여성의 등을 어루만져 주며 위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곡이다. 긴 지속음을 중심으로 수평적 선율선의 겹침에서 나타나는 투명한 음향층으로 고요한 슬픔을 표현한 이 작품에서 팔십 평생 음악에 헌신한 박영희의 삶을 잔잔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연주된 임영진의 ‘주의 날개 그늘에서’는 신에게 보내는 인간의 헌사를 격렬한 관현악 음향과 고요한 실내악 사운드의 파노라마로 펼쳤다. 천상병 시인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김진수의 ‘귀천’은 KAL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친지를 추모하는 작품으로, 강한 시그널 음향으로 시작하여 목관악기의 모방적 응답, 여백의 미를 드러내는 고요한 음악적 진행을 통해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며 추모하는 감정이 형상화되었다.

2부는 ‘창작이 살아야 문화가 산다’고 역설하였던 황성호의 ‘모멘토’로 시작되었다. 여러 속도의 운동성과 긴장감, 음역과 악기군의 배합에서 나타나는 색채와 질감의 대비를 통해 평생을 음악에 몸담은 자신의 삶을 축약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문희의 ‘점들의 번식’에서는 칸딘스키의 예술관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며 작곡가 자신을 치밀하게 형상화하였고, 김지현의 ‘도시 풍경’은 팬데믹 시절의 삭막한 도시를 보며 이전에 활기찬 풍경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자동차 경적 소리를 모방한 화음을 통해 경쾌하게 드러냈다. 모두 인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무엇에 관해 말하는 예술 작품은 우리를 우리 자신과 대면시킨다. 예술 작품이 말하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다.” 철학자 가다머(H. G. Gadamer)의 말처럼, 예술은 인간의 본질을 사유하게 하고, 인간다운 삶을 이끄는 등대와 같다. 이번 작곡가협회 70주년 기념음악제에서 살아있는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예술의 의미를 생각하고, 또 나 자신과 만날 수 있었다. 한국 현대음악의 매력을 더욱 많은 청중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