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먹었냐!” 폭언에 상처… 청각장애인 ‘알바 극복기’

정고운 2024. 11. 1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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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농인들의 이야기③
거절·오해에도 꿋꿋… 농인 알바생으로 살아남기
“작은 일부터 조금씩, 내 자리에서 최선 다해”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기사 내용과 직접적 관련 없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청각장애인 장모(27·여)씨는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마친 직후부터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편의점은 물론 고깃집과 당구장·PC방·베이커리에서의 경력을 합하면 5년이 훌쩍 넘는다. 구직부터 근무까지 무엇하나 순탄치 않았지만, 장씨는 스무 살 아르바이트생 시절을 값진 경험으로 떠올렸다.

청각장애 밝히기 무섭게 ‘탈락’… 시작부터 난관


장씨는 처음 채용에 거절당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듣지 못하는 직원을 반기는 사업장은 많지 않다. 장씨는 구직 초기 한 한식 뷔페 주방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 ‘청각장애인 지원 가능’이라 적힌 구인 글을 보고 자신감이 생겼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면접을 봤고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나 면접 막바지에 장씨가 청각장애인임을 밝히자 점주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청각장애인도 일할 수 있다는 구인 글을 보고 기뻤다”는 장씨의 말이 무색하게 긴 침묵이 흘렀다. 점주는 잠시 고민해보겠다며 일단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불길한 예감이 사라지진 않았다.

5분 뒤 문자가 왔다. 구인 글을 잘못 올린 것 같다며 뽑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낙담한 장씨는 다음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는 절대로 청각장애를 밝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장씨가 겪은 상황은 농인들에겐 흔한 일이다. 청각장애인 오모(29·여)씨는 면접에서 탈락한 농인 지인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는 “카페나 편의점 같은 서비스 업종에는 지원할 엄두조차 못 냈다”며 많은 농인이 손님과의 대화가 필요한 일보다는 힘을 쓰는 직종에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장씨는 장애인 근로자 지원 정책이 고용주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장애인을 고용하는 업장에 근로 지원인을 배치해주거나 청각 보조공학기기 대여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장씨는 “장애인이 무조건 업무에 방해가 될 거라 생각하기 전에 함께 일할 방법을 고민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귀먹었냐” 손님 호통에 자책만… 근무 난이도 두 배

어렵게 일자리를 구한 장씨는 자신의 장애가 근무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하려고 다른 근무자들의 두 배로 노력했다. 동료들과의 대화에 끼지 못하거나 무전기로 전달되는 지시를 놓치지 않으려 종일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이 갑자기 바빠져 업무가 변경될 때면 전달 사항을 제대로 듣지 못해 실수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최악의 상황은 손님과 대면했을 때 벌어졌다. 편의점에서 일하던 중 담배를 사려는 손님에게 정확한 상표명과 용량을 물어보자 “나는 똑바로 얘기했는데 귀가 안 들리냐”는 호통이 돌아왔다. 급기야 모자를 벗어 던지고 부모님까지 들먹이며 소리치는 손님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당황한 장씨를 본 동료가 대신 나서 상대하며 상황은 일단락됐다.

장씨는 자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책망했다. 동료는 장씨의 장애 때문이 아니라 비장애인도 누구나 겪는 일이라며 그를 위로했다. 얼마 뒤 옆 계산대에서 동료가 장씨와 같은 상황에 놓여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고 그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됐다. 이후 손님에게 ‘안 들리냐’는 비아냥을 들으면 속으로 외쳤다.“네, 청각장애인입니다.”

오씨도 코로나 시기 편의점에서 근무했다. 마스크를 쓴 손님들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없어 필담을 요청했지만, 손님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하고 말로만 대화를 이어갔다. 어쩔 수 없이 몸짓과 표정을 동원해 소통하느라 진땀을 뺐다. 답답해하는 손님들을 보며 오씨의 마음도 타들어 갔다.

오씨는 “근무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며 “항상 두려움 반 걱정 반으로 일했다”고 털어놨다. 하루하루가 외로운 사투의 연속이었지만, 오씨는 약속된 계약 기간을 끝까지 채우고 후련하게 업장을 나왔다.

고생길 거쳐 프로 일꾼으로… “1인분 멋지게 해내요”


장씨가 아르바이트를 오래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눈치’다. 손님을 대할 땐 항상 떨렸지만, 차분히 입 모양을 보며 어떤 말을 하는지 추론했다. 상대방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입을 빤히 보는 대신 눈과 코 사이로 시선을 나눠 보내는 센스도 갖췄다.

다양한 직종에서의 근무 경험은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줬다. 당구장에서 일하던 시기 남성 손님들의 낮은 목소리를 듣지 못해 주문을 놓치는 일이 생기자 장씨는 고민 끝에 아이디어를 냈다. 청량한 소리가 나는 종을 가져와 계산대 근처에 뒀다. 손님들이 편하게 종을 울려 장씨를 부르면 그는 손님의 얼굴을 보고 정확히 주문을 받았다.

장씨는 “돌발 상황에서 문제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이어 “장애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는 장애인 당사자가 가장 빠르고 쉬운 해결책을 떠올릴 수 있다”면서 실수에 충분히 좌절한 다음 문제점을 찾고 고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전했다.

현재 어엿한 직장인이 된 장씨는 지난 시절을 뿌듯하게 추억했다. 그는 “힘든 만큼 얻은 게 많은 경험이었다”며 “근무 노하우가 쌓일수록 일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 다른 분야 취업도 시도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오씨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농인들을 향해 쉽게 포기하지 말라 당부했다. 그는 “작은 일이라도 조금씩 도전해 경험을 쌓다 보면 훗날 다양한 상황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능력을 갖추게 될 거라 믿는다”고 조언했다.

[농담]은 일상 속 농인들을 취재합니다. 청인사회와 같은 듯 다른 농사회의 모습, 소리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쾌하고 진실한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정고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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