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MP 칼럼]트럼프 2.0에서 미국의 동남아시아 영향력이 감소할 수 있는 이유
"나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멈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대선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둔 뒤 연설에서 한 말이다. 그는 "우리 행정부에서는 ISIS(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를 괄목할 만한 속도로 격퇴한 것 외에는 전쟁이 없었다"라고도 주장했다. 이를 반박하는 증거가 있긴 하지만 최근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두 가지 주요 분쟁이 곧 퇴임을 앞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재임 기간에 발생한 점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빚어진 미국의 재앙적인 군사 개입을 감독했던 과거 공화당 관리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다. 거친 언변과 독재자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미국 경제와 인프라 투자를 위해 해외 전쟁을 종식하려는 '피스메이커'로 자리매김해온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의 승리를 미국의 경쟁국들조차 조심스럽게 환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트럼프 당선인을 "용감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우며 양국 관계를 재설정할 기회가 왔음에 반색했다. 이란의 부통령이자 베테랑 외교관인 무함마드 자바드 자리프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공약대로 진행 중인 전쟁은 끝내고 새로운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유권자들의 분명한 교훈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는 희망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또한 트럼프 당선인에게 "양국은 협력을 통해 이익을 얻고 대결을 통해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이러한 최선의 시나리오를 희망하면서도 트럼프 2.0이 초래할 험난한 시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민부터 무역까지 미국은 다양한 이슈에 대한 보호주의적이고 일방적이며 대립적인 정책을 펼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올해 미국 대선 결과가 전 세계에 준 충격은 2016년 때보다는 덜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여론조사의 예측을 물 먹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도 하다. 오히려 동맹국과 경쟁국들은 모두 트럼프 당선인의 복귀 가능성을 점치고 외교 정책을 준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아시아는 트럼프 당선인의 복귀에 대체로 태연한 분위기다. 올해 아시아 지역을 방문하면서 내가 만난 관리들과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트럼프 1기 시절은 전반적으로 대응이 쉬웠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론적으로 트럼프 당선인은 동남아시아 지도자들에게 더 호감을 줄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가치 외교' 노선에서 벗어나 직관적인 '기브 앤드 테이크' 외교 노선을 선호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훈 센 캄보디아 상원의장 등 동남아시아의 이른바 '스트롱맨' 유형의 리더들은 트럼프 당선인과 훨씬 쉽게 협상에 나설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통치하는 미국에서 싱가포르라는 주요 파트너를 배제한 채 '민주주의를 위한 정상회의' 같은 행사를 개최하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게다가 미국은 조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 동남아시아 사상가들 사이에서 신뢰도가 급격히 추락하기도 했다. 올해 ISEAS-유소프 이샤크 연구소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말레이시아(75%), 인도네시아(73%), 브루나이(70%)의 응답자 대다수가 미국보다 중국을 더 선호했다. 이들 국가의 중국 지지율은 전년보다 두 자릿수 증가했다. 이들 국가의 응답자들이 가자지구 분쟁을 지정학적 최대 관심사로 꼽은 것을 고려하면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을 향한 바이든 행정부의 철통같은 지지가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소외시킨 것이 분명해 보인다.
차기 행정부에서 누가 주요 내각 직책을 맡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현재까지 윤곽이 드러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전반적인 외교 노선은 험로가 예고되는 상황이다. 미국 대선 결과 공화당은 전례 없는 수준의 권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극도로 보수적인 미 연방 대법원과 소위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마가) 세력은 이민 강경책을 비롯한 급진적인 정책들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미국 내에서, 특히 민주당 강세 지역의 거센 저항과 내전을 초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요 동맹국 및 파트너와의 관계도 긴장시킬 수 있다. 주미 필리핀 대사는 이미 미국에 있는 수많은 필리핀 불법 이민자들에게 전방위 단속이 시작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귀국할 것을 권고한 상태다.
트럼프 당선인의 재집권은 무역 측면에서도 나쁜 소식이다. 자칭 '관세맨'인 트럼프 당선인은 중국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수출국에도 고율의 관세를 부과할 방침이다. 무역전쟁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특히 큰 타격을 줄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관세 공약을 강행할 경우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권 국가들의 대미 수출은 최대 8%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설상가상으로 트럼프 당선인은 과거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폐기했던 것처럼 취임 후 바이든 행정부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도 폐기할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 파트너국들로부터의 수입은 점점 옥죄려 하지만 새로운 다자간 경제 이니셔티브를 구축하려는 징후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미국은 더 공격적인 일방주의 외교정책을 펼칠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국가의 외교·안보 라인을 미국 우선주의 기조를 받드는 강경·충성파 인사들로 채울 수 있다. 여기에 제동을 걸 베타랑 국방 전문가와 군 관리들의 자리는 사라지고 미국의 군사적 실수 가능성은 높아질 수 있다. 여태껏 나타난 징후들을 미루어볼 때 미국은 이란과 같은 적대국에 대해 강경책을 채택할 것이며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지원도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중동에서 대규모 분쟁을 일으켜 동남아시아의 반(反)서방 정서를 더욱 부추기고 중국과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미국의 역량을 약화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트럼프 당선인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 중 하나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더 떨어뜨릴 수 있는 셈이다.
리처드 헤이다리안 필리핀 폴리테크닉대학교 지정학 교수
이 글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칼럼 ‘Why US influence in Southeast Asia could decline under Trump 2.0’를 아시아경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이 칼럼은 아시아경제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게재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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