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정담]정근식 "제2의 한강 작가가 나오는 서울교육으로"
역사 진실 찾기는 삶의 목표
혁신교육, 지혜 길러주는 교육으로
"199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10주기 때, 시민 500여명의 얘기를 채록한 자료집을 함께 만든 일이 생각났다."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에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기억의 공유’와 관련이 있다. 한강 작가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5·18 채록집을 읽어봤을 것이란 생각, 아니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수들을 비롯한 여러 학자와 조사원들이 발로 뛰며 모아냈던 역사의 증언은 소설에 녹아 있다.
한강 작가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광주의 기억을 관통하는 내용이다. 대중이 흔히 접했을 영화나 드라마, 서적에는 담기지 않았던 더 참혹한 고통과 아픔의 상흔이 그 책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광주에 있었던 시민의 생생한 증언은 ‘소년이 온다’에 담겨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독자들에게 전달됐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출신이자 역사와 전쟁의 본질에 천착해 온 학자에게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감동이라는 두 글자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정 교육감은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히고자 출범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장관급)을 역임한 인물이다.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의 목표이자 삶의 이유였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선 진실의 공유, 평생을 갈망했던 그것이 현실로 구현된 순간이다.
"기분이 참 좋다. 마치 내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듯한 느낌이다."
정 교육감은 지난 7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가슴 벅찼던 그 기억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특히 정 교육감은 1990년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 시절 힘겨웠던 한국인에게 삶의 위로를 안겨줬던 야구의 박찬호, 골프의 박세리 선수를 거론하며 "한강 작가는 굉장히 어려운 시기에 우리 한국인의 문학적 성과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강의 작품을 읽고 자란 한강 세대의 탄생 가능성에 주목했다.
삶에서 머무름의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 입시의 압박감 속에서도 멈춤과 명상, 신체활동과 정신활동의 조화에 관해 우리 교육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당부다. 우리 아이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사회가, 교육자들이 그리고 학생, 학부모들이 함께 길을 찾아가야 한다는 제언이다.
"학생들에게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교육이야말로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정 교육감이 꿈꾸는, 이른바 살아 있는 교육은 그런 밑그림을 토대로 이뤄진다. 지식을 넘어 지혜를 깨닫게 하는 과정. ‘혁신교육’이라는 이미지 틀 속에서만 정근식의 서울 교육을 해석하려 들지 말고, 사고의 틀을 함께 확장해 보자는 제안.
정 교육감의 큰 그림과 관련해 한강 작가의 쾌거는 변화의 마중물로 작용할 수 있을까. "노벨상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서울 교육안에서도 제2의 한강 작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기대를…."
정 교육감은 희망의 단초를 전하면서 아이들과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행사장에 간 일이 있는데 학생들이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대학 입시를 경험하고 대학생이 되는 순간까지도 그 밝음과 행복함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문화 감수성의 확장, 마음의 건강까지 뒤따라야 그 바람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수많은 이의 이해 요구가 얽혀 있는 교육 현장. 서울 교육의 수장은 때로는 갈등의 조정자로, 때로는 시대의 선각자로 나서야 한다. 진정으로 머무름의 가치를 되새기려면 우리 교육의 많은 부분이 바뀌어야 한다.
정 교육감은 서울시교육청과 담을 맞대고 있는 경희궁을 거닐면서 아이들과 함께 그려 나갈 그 길을 떠올렸다. 경쟁의 늪에서 청춘이라는 꽃을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한 채 스러지는 우리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되살리려면 서울시교육감은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입시는 물론이고, 삶에서도 결과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아이들이 깨닫게 하기 위한 여정은 이미 시작됐다.
다음은 정근식 서울시교육감과의 일문일답 전문.
-1호 결재 정책인 '학습진단 치유센터' 정책은 어느 정도 추진이 됐나.
▲1대 1 지원을 위해서는 많은 예산이 필요한데, 수요에 맞게 충분히 지원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진행한 '2024 서울 학생 문해력·수리력 진단검사'에는 지난해와 비교해 두 배 이상의 학생이 응시해서 놀랐다.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특·장점과 약점을 진단받고 개발하려는 수요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와 함께 기초학력 수준이 부족한 학생을 배려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론 우수한 학생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계도 필요하다. '서울학습진단치유센터' 자체 TF(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해 사업 운영을 준비하도록 할 예정이다.
-교육감 후보 시절 역사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했는데.
▲학생들이 본인이 경험한 역사적 사건을 어떤 식으로 기억하는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의 문제는 중요하다. 즉 역사와 기억의 문제는 같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전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보다 많은 역사적인 자료들을 어떻게 제공해드릴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다만 올해 편성된 관련 예산이 2억원 정도라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서울시교육청 예산이 부족해 보이는데.
▲몇 년 전엔 13조원 정도였다가 12조원대로 떨어졌고, 지난해에는 11조원이었다가 올해는 10조8000억원 규모로 줄었다. 학생 수가 줄어들었다는 이유를 대지만, 인재 육성에 대한 투자가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담배소비세분, 지방교육세와 고교 무상교육 국고 부담 일몰 문제 등이(예산을 둘러싼 쟁점 현안이) 남아 있다. 그래서 서울시교육청 예산은 보수적으로 편성했다. 그러다 보니 꼭 들어가야 할 사업 이외에 노후시설 개선을 위한 예산이 너무 줄어들어서 혹시라도 사고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 많다.
-'혁신교육'을 어떻게 발전시킬 생각인지.
▲사람들을 만나 들어보면 혁신교육에 관해 대부분 만족하시지만, 찬반 의견을 물어보면 찬성이 5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혁신교육의 성과를 시민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지 못했거나 혁신교육이라는 말이 10년간 사용되다 보니 피로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교육의 기본 틀을 바꾸는 새로운 교육의 개념으로 시민들에게 좀 더 친숙하고 친밀하게 다가가고자 한다. 지식과 지혜를 가진 사람은 다르다. 창의교육은 지혜를 길러주는 교육이다. 단순한 정보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지혜가 결합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부가 추진하는 AI(인공지능) 교과서 정책에 대한 생각은?
▲11월29일까지 AI 교과서 검정 작업을 완료한다는데 개발 업체 입장에서도, 각 학교, 교사, 학생 입장에서도 불안한 상황이다. 내년 3월 신학기 시작 전까지 12월부터 1월, 2월까지 석 달밖에 없다. 석 달 만에 도입 준비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학생 디지털 기기 의존도가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디지털 쉼표'가 강조되는 상황에서 AI 교과서 도입에 관해 따져봐야 한다. 서울시교육청 입장에서는 상반되는 시대적 흐름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고민일 수밖에 없다. 정부 정책을 완전히 반대할 수도 없고, 불안을 너무 부추길 필요도 없는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다.
-14일은 때마침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날이다. 학생들에게 격려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수능을 치르는 학생들에게 (유튜브 채널을 통해)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수능을 준비하느라고 정말 고생이 많았다.
한편 정근식 교육감은 12일 공개한 유튜브 메시지를 통해 "여러분이 여기까지 오는 길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왔다. 매 순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온 자신을 믿고 끝까지 힘내시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노력과 열정이 빛날 수 있도록 응원하겠다. 또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험생 곁을 지켜주신 부모님과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대담=류정민 사회부장
정리=박준이 기자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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