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대장군 꿈꾸던 노예, 괜히 1억부 팔린 게 아니네
[김성호 평론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억부 클럽'이란 것이 있다. 한국의 천만영화 쯤이 비슷한 개념일까. 일본 만화산업 가운데서 단일 작품 단행본 판매 누적 부수가 1억부를 돌파한 작품을 이르는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만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원피스>를 필두로, 모두 20편가량의 작품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중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작품은 절반가량이다. 산업적 측면에서 황금알을 낳는 오리의 배를 굳이 가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얘기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작품의 질 못잖게 작품을 대중에 알리고 애정을 갖도록 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작품은 수십 년이 넘도록 연재를 이어가며 작가와 생을 같이 하기도 하는 것이다.
1억부 클럽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작품으로 <킹덤>이 있다. <진격의 거인>이나 <귀멸의 칼날>을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1억부 클럽에 오른 작품으로, 2006년 연재를 시작했다. 작가는 하라 야스히사, 저 유명한 <슬램덩크>와 <배가본드>를 만든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문하에 있었던 이다. 그가 신인 등용문으로 유명한 <주간 영 점프> 공모에 당선된 뒤 연재를 시작한 작품이 바로 <킹덤>이 되겠다.
▲ <킹덤> 스틸컷 |
ⓒ 와이드 릴리즈 |
성공한 만화가 밟는 길은 이미 잘 닦여져 있다. 처음엔 TV 판과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상영부터 판권, 관련 상품 판매까지 상당한 수익을 올린다. 가능한 설정이라면 그다음은 실사화해 영화로까지 제작한다. 잘 만든 콘텐츠 하나가 유관 업계에까지 연거푸 상승효과를 미치는 셈이다.
<킹덤>이 밟아온 길이 꼭 그와 같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성공작인 이 작품은 네 번째 실사영화가 곧 한국개봉을 앞두고 있다. 예고된 애니메이션 성공에 이어 실사화까지 급물살을 탔고, 2019년부터 작품이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심지어 시리즈의 끝이 어디가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꾸준히 연재되는 작품은 이제 한창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고, 그 설정 역시 무척이나 방대해 보는 이로 하여금 완결을 질질 끈다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고 있는 탓이다. 그리하여 오구리 슌이나 하시모토 칸나 같은 톱스타들을 여럿 기용하고 상당한 자본까지 투자한 이 작품이 일본 역사상 가장 장대한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으리란 평가까지 이어지고 있다.
실사영화는 만화 도입부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 왔다. 영화의 배경은 전국 칠웅이 갈라져 200여 년간 전쟁을 벌이고 있던 중국 전국시대 말기다. 주나라가 이룩한 봉건제도가 붕괴되고 중원 각지에 수많은 군웅이 일어났다. 전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뒤엔 각 나라 간의 전란이 거듭됐고 조위한제연진초, 모두 일곱 나라가 경쟁하는 시대가 이어졌다. 이 중 가장 서쪽 시안땅에 터 잡은 진나라가 이야기의 중심을 이룬다.
▲ <킹덤> 포스터 |
ⓒ 와이드 릴리즈 |
그로부터 매일 수련이 이어진다. 나무를 하러 숲에 들어갈 때면 목검을 들고 신과 표는 전력으로 맞붙는다. 일만 번 정도 서로를 진짜로 벨 듯 싸우다 보면 강해지리란 기대, 그것이 저들을 장군의 길로 데려다줄 것이란 믿음이 그들에겐 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에 더욱 절실하고 절절한 맹목적인 열망이 서로를 키운다. 그들은 그렇게 제 나름으로 강해진다.
▲ <킹덤> 스틸컷 |
ⓒ 와이드 릴리즈 |
일생을 노예로 살아온 표에겐 특별한 기회다. 신을 함께 데려가달라 청하였으나 창문군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생의 단짝을 잃었으나 가지 말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 키워온 사내들의 우정인가. 오로지 표의 미래가 밝기만 바랄 뿐, 다른 마음을 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킹덤> 원작을 본 많은 이의 관심을 단박에 잡아끈 흡입력 있는 도입이 마침내 펼쳐진다. 어느 날 밤 평소처럼 헛간에서 잠을 청하던 신 앞에 꿈에 그리던 벗 표가 나타난다. 일생 보지 못한 화려한 차림을 했으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 저는 틀렸다고, 곧 숨을 거두리라 말하는 표가 신에게 급히 이야기를 전한다. 약도 한 장을 건네며 그곳으로 가면 필요한 걸 알 수 있으리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표. 함께 미래를 꿈꾸려 했던 친구를 어이없게 잃어버리는 소년 신, 그로부터 <킹덤>의 장대한 이야기가 출발한다.
▲ <킹덤> 스틸컷 |
ⓒ 와이드 릴리즈 |
사토 신스케에게 <킹덤> 시리즈는 숙명과도 같은 작업이다. 그는 직접 기획부터 각본 작업에 참여한 건 물론, 영화의 세부요소까지 관장하며 시리즈를 반드시 성공케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 결과가 첫 작품 <킹덤>에서 바로 드러난다. 캐스팅부터가 당대 일본 최고의 스타들을 아우르고, CG기술 또한 중화 대륙에서 펼쳐지는 일대 격전을 살려내기에 큰 부족함이 없다. 그 규모에 있어 이제껏 있었던 일본 사극 가운데서도 최상단에 오를 만한 작품으로, 첫 편을 원작 도입부를 그리는 정도에서 만족할 만큼 장기 프로젝트로 이어갈 의지를 표명했다.
표의 죽음에 얽힌 사연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소년 신,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도리어 천하에 발을 내딛게 된 그의 시작이 호쾌하게 그려진다. <킹덤> 시리즈 초반부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라 해도 좋을 장군 왕기(오오사와 타카오 분) 또한 인상적으로 등장하며, 당대의 시대적 배경부터 개별 인물의 성격, 각자의 관계까지를 튼실하게 풀어나간다. 탄탄한 원작이 있어 가능한 일이지만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적절한 선택을 거듭한 감독 사토 신스케의 역량이 돋보였다 하겠다. 이를 보다 보면 작품을 감수한 하라 야스히사가 어째서 각본이 훌륭하다 칭찬했는지 알 만도 하다.
다만 칼과 창, 활을 들고 나누는 액션 연출에선 부족함이 엿보인다. CG 활용이나 배우들의 연기, 드라마에선 다소 아쉬운 점이 있어도 대체로는 출중한 부분이 적지 않지만, 대규모 격전 과정에서 주변부 엑스트라가 격렬한 액션 대신 장난을 치는 듯한 몸짓을 보인다거나 주요한 장면임에도 흉내만 내는 듯한 장면이 눈에 띄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액션 연기에 익숙지 않은 배우가 대거 포진한 상황에 더해, 만화적 액션을 실사로 구현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 또 고대 중국에서 활용해 온 병장기를 다루는 법 등 현실적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토 신스케가 후속편에서, 특히 곧 개봉할 작품으로 규모 있는 액션이 등장하게 될 4편에서 이를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느냐에 따라 시리즈에 대한 평가가 크게 갈릴 것이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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