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재곤 (3) 인생을 바꾼 ‘닭’과의 만남은 외로웠다

장창일 2024. 11. 1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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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40세, 어머니는 39세 때 세상을 떠나셨다.

남대문시장에서 닭을 팔았는데 그곳으로 날 데려갔다.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닭과는 이렇게 만났다.

처음에는 손질한 생닭을 자전거에 싣고 배달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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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재로 변해 돌아오신 부모님
소년 가장으로 살며 동생과 생이별
닭 팔던 육촌 형님과 함께 일 시작
운명처럼 다가온 닭 사업의 인연
김재곤 가마치통닭 대표가 몇 해 전 서울 경희대병원 영안실 앞 단풍나무의 나뭇잎을 만지고 있다. 김 대표는 1972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 나무에 기대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지는 40세, 어머니는 39세 때 세상을 떠나셨다. 온 동네가 깊은 슬픔에 빠졌다. 하지만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된 내겐 슬픔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저 고아일 뿐이었다. 경희대병원 영안실 앞에 있던 단풍나무가 유난히 붉게 빛났었다. 그 나무에 기대 울고 또 울었다.

장례 비용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딱한 사정을 들은 병원에서 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부모님은 벽제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변해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동생들은 내가 우니 따라서 울 뿐, 그 슬픔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이제는 내가 가장이구나.’ 마음으로는 각오를 했지만 몸은 어렸다. 담임선생님은 학비 걱정하지 말고 학업에 매진하라고 위로해 주셨다. 하지만 내게는 돌봐야 할 동생들이 있었다. 당장 살 집의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했다. 꾸역꾸역 한 달 동안 학교에 더 나간 뒤에 포기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우리 남매는 뿔뿔이 흩어졌다. 큰 누이는 서울의 육촌 형님 집으로 갔고 나머지 동생들은 고향의 큰집으로 돌아갔다. 생이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기가 막혔다. 눈물이 앞으로 가려 이별의 순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서울에 남았다. 남은 가족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반년 가까이 신문 배달을 했고 끼니때가 되면 라면을 끓였다. 내 처지를 가엽게 보신 이웃들이 종종 밥을 해주셨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늘 배고팠고 외로웠다. 겨울이면 연탄 살 돈이 없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지냈다.

해가 지나 1973년 봄이 됐는데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친척 형님이 찾아왔다. 만곤이 형은 나와는 육촌이었다. 남대문시장에서 닭을 팔았는데 그곳으로 날 데려갔다. “재곤아, 같이 일하자.”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얼마나 힘든 일상이 펼쳐질지는 담기지 않았다.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닭과는 이렇게 만났다. 지금 생각하면 운명과도 같았다. 직업도 갖게 됐고 밥도 거르지 않고 먹게 됐는데 월급도 5000원이나 받았다. 감사한 일이었다. 가게는 종일 바빴다. 처음에는 손질한 생닭을 자전거에 싣고 배달만 했다. 닭에서 물이 나와 버스를 탈 수 없어 자전거가 유일한 배달 수단이었다.

짐 자전거는 내 몸보다 너무 컸다. 자동차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가면서 닭을 날랐다. 잠은 가게 2층에 딸린 좁은 방에서 대여섯 명의 직원과 함께 잤다. 칼잠을 자야 했지만 그래도 당시 내겐 유일한 기댈 언덕이었다. 매일 닭을 잡고 손질하던 공간에서 잠을 청한다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불결했지만 누우면 바로 잠드는 일상이 반복됐다.

배달이 익숙해지자 이제는 닭 도축 일이 맡겨졌다. 직접 잡은 닭을 배달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울면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의 빈자리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공허한 마음을 채운 건 흩어진 동생들이었다. 북악스카이웨이 중턱에 있던 식당 배달이 유독 고역이었다.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면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코피를 쏟으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삶의 이유가 된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이 나날이 커지던 어느 날이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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